신문에 실린 학봉 선조에 관한 글

조회 수 9987 추천 수 131 2006.12.31 15:01:37
[이덕일 사랑] 임진왜란과 김성일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조선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이유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에서 찾는 경향이 많다. 서인인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이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동인인 김성일이 당파심에서 달리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조보감’ 선조 24년(1591)조는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해서 김성일이 달리 말했다고 전한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만날 때 황윤길은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국왕이 아니라 관백(關白)이니 당(堂) 위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만난 후에 답서(答書)도 주지 않고 현재의 오사카 계시(界市)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자 김성일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황윤길은 서둘러 떠났는데,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는 ‘억류를 당할까 두려워서’였다고 쓰고 있다. 겨우 받은 답서에 ‘조선국왕 전하(殿下)’가 정승의 호칭인 ‘합하(閤下)’로 되어 있자 김성일 혼자 강하게 항의한 것도 그런 예다. 그러나 김성일은 유성룡이 “만약 병화(兵禍)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해명한 것이다”라고 전쟁 가능성을 시인하기도 했다.


전란의 조짐은 김성일의 귀국 보고를 뒤덮을 만큼 많았다. 풍신수길의 답서에 ‘명나라에 쳐들어갈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구절이 있어서 조야(朝野)는 이미 충격을 받았다. 임란 1년 전 조선에 온 일본의 회례사(回禮使) 평조신(平調信)은 침략을 공언했고, 이들을 접대했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은 ‘명년(1592)에 침략할 것’이라고 정확히 보고했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해 조정엔 전쟁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풍신수길이 미치지 않고서야 설마 공격하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자신들은 전혀 몰랐다는 듯 김성일을 희생양 삼아 빠져나갔다. 진정한 평화주의자는 0.1%의 전쟁 가능성에도 대비하는 사람이지 불확실성에 의존하는 ‘설마주의자’가 아니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속담은 이래서 가치가 있다.

이 기사는 2006년 12월 29일 조선일보에서

김홍엽

2008.01.13 21:19:55

임진왜란 당시 문학공할아버지(거자익)의 6세손이신 오봉할아버지께서 호남지방에서

아래와 같이 창의를 하신 배경에는 학봉할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단순히 역사에서는 바르게 보고하지 않음을 책하는면도 있으나 미리 대비하신

오봉할아버지(당시66세)와 학봉할아버지(당시55세)의 노력에 대해 자세히 알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오봉할아버지의 15세손입니다


정읍 덕천 도계리 출신 충강공(忠剛公) 김제민(金齊閔:1527 중종 22∼ 1599 선조 32)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이요 의병장이다. 공의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峯), 본관은 의성(義城),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공의 증조부는 휘가 운추(運秋)이다. 호는 추정(秋亭)으로 진사시와 문과를 연이어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학행으로 명망이 높았다. 오봉 선생의 조부는 부현(傅顯)으로 부사직(副司直), 직장(直長) 벼슬을 지냈다. 부현의 배위(配位)인 숙인(淑人) 경주 최씨가 세 아들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전라도 고부군 천태산 아래 도계리(현재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에 터전을 잡아 살기 시작하여 그 후손이 지금까지도 이곳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오봉 선생의 부친 호(顥)는 부호군(副護軍) 벼슬을 하였으며, 손자 영(暎)이 인조반정 때 정사일등훈(靖社一等勳)을 받음으로써 형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오봉 김제민은 부친 호(顥)와 부인 김씨 사이에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갓집 부안 옹정리에서 태어나 덕천 도계리에서 성장하였다. 지금 정읍에 살고 있는 의성 김씨는 공의 조부이신 부현(傅顯)의 후손이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이 과인하고 도량이 담대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공은 일찍이 석학(碩學)이자 거유(巨儒)인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공의 재질에 스승의 학문을 더하자 학덕이 일취월장하였다. 일재(一齋) 이항 선생의 학문은 수많은 경전(經典)을 통관한 것으로 철저한 자기성찰과 정심성의(正心誠意)를 근본으로 삼아 치지격물(致知格物)을 수도(修道)의 주된 방법으로 삼았다. 일재 선생의 선악시비를 명쾌히 분별하는 지치주의(知致主義)는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감을 낳게 한다. 일재 선생은 부조리나 불의에 대항하고자 제자들에게 무술과 병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는 어쩌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안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재의 문하생 가운데 김제민을 비롯한 김천일, 변사정과 같은 의병장을 배출하고, 손홍록, 안의, 김대립과 같은 충의지사를 배출한 것은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이다.

공은 경학과 역사에 정통하였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통달하였다. 공은 32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4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지평(持坪),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선조 12년(1579년) 박사(博士)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르러 팔도의 향시(鄕試)를 관장하였다. 외직으로는 함양, 화순, 순창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선조 19년(1586년)에는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를 제수를 받았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군기시정, 예조정랑을 거쳐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나라의 내외 중직을 맡아 강직한 성품으로 충성을 다하여 사후에도 명성이 자자하였거니와, 임란공신으로 추앙을 받아 "충강공"이라는 시호까지 하사 받고 덕천 도계서원과 장성 오산창의사에 배향되기에 이르렀다.

공은 시문에도 뛰어나 문집 『오봉집』(鰲峯集)을 통하여 공의 다재다능한 문학과 학문의 세계를 접할 수 있거니와 그야말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충절이라 아니할 수 없다.
1586년(선조 19년) 전라도도사를 끝으로 병을 얻어 관직에서 사퇴한 후, 향리에 칩거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공의 나이 66세였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적이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임금이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공은 우리 조선 땅을 침범한 왜적들에 대하여 비분강개한 심정에 불타오르고 충군 애국심이 솟구쳐, 자제들을 불러모아 공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북향사배를 올리고서 하루 종일 대성통곡하였다. 공은 비분절통한 심정으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어왔는데, 아비와 같은 임금께서 몽진의 날을 맞았으니, 아들과 같은 우리 신하로서는 의(義)로써 죽을 것이니라." 라고 하였다. 공은 참담하고 의분이 치솟아 눈물을 흘리며 <聞大駕幸平壤 designtimesp=18261>(임금께서 평양으로 몽진한다는 소식을 듣고)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三千里外一孤臣(삼천리 밖에 있는 한 외로운 신하가)
望關西淚巾(구슬피 관서를 바라보며 수건에 눈물 적시네)
驛路多虞豹虎亂(길마다 시랑이 호랑이 놈들이 날뛰고 있으니)
何人能扈屬車塵(어느 누가 어가를 잘 호종하고나 있는지?)

공은 곧바로 왜적을 물리치고 임금을 보호하기 위하여 의병을 모집하기로 결심하였다. 공은 각 고을에 <征倭檄文 designtimesp=18269>(왜적을 정벌하자는 격문)을 모집하니, 정읍, 고창, 흥덕, 고부를 비롯한 각지에서 우국충정에 불타는 의사들이 삼례역으로 모여들었다. 이에 공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호남지방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공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고산 대둔산 아래에서 무운장구를 비는 산제(山祭)를 올리고 임금을 호종하려 출발하였다가 금산에 주둔한 왜적들이 전주를 향하여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웅치(熊峙: 곰티재)로 달려갔다. 이 때 금산(錦山)에서는 고경명 장군이 왜적을 지키고 있었고, 김제군수 정담(鄭湛)과 함께 웅치전투에 참전하였다. 공은 66세의 나이로 몸소 북채를 들고 격려하며 의병들을 진두지휘하였다. 마침내 전투 속에서 김제군수 정담이 죽고 공의 아들 안(晏)이 죽는 등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왜적들도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마침내 웅치전투에서 왜적이 방어선을 넘지 못하고 퇴각하여 마침내 공은 웅치전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 웅치전의 위대한 승리로 곡창지대인 전라도가 온전하게 되어 당시 권율 장군도 "전라도 웅치대첩이 행주대첩보다 위"라고 평가하였다.

이어서 호남지역 의병들의 총궐기라고 할 수 있는 장성에서의 남문 창의(南門倡義)는 그야말로 가장 규모가 큰 병력이었다. 여기서 공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군기와 군율을 엄히 하고, 군사들을 잘 조련하여 덕평, 천안을 거쳐 직산으로 진격하였다. 직산에서 왜적을 교전하여 왜병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임금이 계시는 곳까지 진군하려고 연일 진군하여 직산을 지나 안성에 이르러 명나라와 왜적이 화의(和議)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대를 이끌고 호남으로 돌아왔다.

공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와 이평(梨坪)의 오치(鰲峙) 아래 독서당을 짓고 후학을 훈도하고 시문을 저술하는 데에 힘썼으며, 고창 부안면에 요파정(樂波亭)을 짓고 풍월을 읊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공은 71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노령이기로 직접 전투에 참여할 수 없자 아들 엽(燁)과 흔(昕 鶴山公)에게 의병을 주어 권율장군에 합세하여 왜적을 물리치게 하였다. 왜적을 저지하고 그들의 소탕하여 다시는 육지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로 공을 호남 3대 창의사로 추앙하여 칭송을 받았다.

공은 1599년(선조 32년) 음 2월 22일 세상을 떠났으며, 선무훈(宣務勳)과 정사훈(靖社勳) 공신에 오르고, 인조 때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73년(현종 14) 도계서원에 배향되고, 1794년(정조 18)에 장성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 배향되었으며, 1829년(순조 29)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854년(철종 5) 충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이 글은 쓰신 유종국님은 전북과학대 교수(국문학)로 재직중이시며, 정읍통문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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