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탐구 3 ---- 실체적 학문을 추구한 성리학자

필자 : 김 앙 섭 (前 종친회 홍보교육간사)

김안국은 조선조 중종때 성리학(性理學)의 거봉(巨峯)이다.
현실적 개혁을 추구하는 시대적 선구자로써 특히 소학(小學)을 권장한 실천적 학문을 추구했다.
덕행(德行)과 풍절(風節)의 도학(道學)은 경지를 초월했고 심오한 문장은 만년 후대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교본으로 전했다.

의성김씨의 자랑인 모재 선조는 동방의 도학자로 우뚝 섰다. 선조(宣祖) 초기에 명나라의 허(許)·위(魏) 두 사람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었다.
이들 사신은 점빈사인 퇴계〔이황〕에게 질문을 했다.
  "조선(朝鮮)에도 공자·맹자의 심학(心學:깊은 마음의 학문)을 아는 자가 있습니까?"
이에 퇴계는 선뜻 대답했다.
  "김굉필·정여창·조광조·김안국·이언적·서경덕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라고 시슴없이 말했다.
다음해는 구희직이라는 사신이 와서 유희춘·기대승에게 물었다.
  "조선에도 주자(朱子)와 같은 이가 있습니까?"
그러자, 이들 역시 전에 퇴계가 한 말처럼 되풀이해 대답했다.
퇴계는 젊었을때 여주(驪州)로 모재공을 찾아가 학문을 물어 대담한 적이 있었다.
이후 퇴계는 모재공을 일컬어 "정인군자(正人君子)의 논하는 바를 선생에게서 처음 들었다."라며 항상 깊이 새겨 위함이 지극했다.

안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곱살부터 소학(小學)을 배웠다. 이때의 영향이 일생동안의 행동에 기틀이 됐다.
"효재(孝哉)라 민자건(閔子騫)이여"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나도 이런 칭찬을 듣도록 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열세살에 이르자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폭넓게 읽혀 학문의 경지가 깊어갔다.
책을 세 번만 읽으면 모두 외우는 천재의 기질을 보였는데 15살 때는 정주학(程朱學)을 사모한 나머지 모든 행동과 예의범절을 그대로 행했다.
문장도 이미 크게 성숙되어 당시 지은 대유부(大遊賦)는 선비들에게 널리 칭찬을 받았다. 학문과 덕행이 완숙된 것이다.

그러나 선비들에게 화제의 인물로 등장하며 장래가 촉망되던 때인 17살에 아버지가 별세했고, 19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니 부모를 모두 잃게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5-6년동안 부모의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며 손수 갈문(喝文)을 지어서 묘 앞에 세웠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슬픔을 참고 학문에 정진하여 24살에 이르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501년(연산 7년)에 실시된 진사(進士)와 생원(生員) 시험에 모두 장원(壯元)을 했다.
이에 시험관은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두 시험에 장원을
모두 한 사람에게 줄 수는 없지 않는가?"라며 생원 시험에는 2등으로 결정했다.

2년 뒤인 1503년(연산 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면서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제수되면서 공직에 나가 바로 정자(正字), 다음해에 저작(著作)으로 계속 승진을 거듭했다.
다시 그해 승정원 주서(注書)로 옮겨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는 등 젊은 학자들이 부리워하는 직책을 맡기 시작했다.

이어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연산군때 일시 파직당했다.
하지만 바로 1506년(연산 12년)에 복직되어 명나라 사신 서목길의 원접사 종사관으로 기용되어 호분위사과(虎賁衛司果)겸 지제교(知製敎)를 제수받았다.
곧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으로 옮겼을 때인 9월 중종반정이 일이나자 홍문관으로 들어가 부교리(副校理)에 올랐다.
문관들이 최고로 치는 청환직을 그대로 하나하나 밟아 올랐다.

중종반정이 일어난지 다음해인 1507년 승문원교리가 됐고, 그해 가을 중시(重試)에 등제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으며,
다음해 예조정랑(禮曹正郞), 그 다음해 장령(掌令),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을 거쳐 성균관 사예(司藝), 1510년에는 내자시부정(內資寺副正)으로 승진했다.
그뒤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옮기는 등 내직의 언로(言路)와 행정(行政)을 두루 맡으면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1511년과 다음해 일본의 사신 붕중( 中)이 왔을때 선위사(宣慰使)로 나가 접대했다.
그가 떠날 때 말하기를, "내가 중국과 유구(流球)에는 두 번씩, 귀국에는 세 번이나 왔는데 공같은 분은 일찍 보지를 못했다."라며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이어 내자시정, 승문원판교, 예조참의, 사간원대사간, 첨지중추부사, 동부승지, 우부승지로 계속 승진했다.

중종 12년(1517년)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오른 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品階)에 오르자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병마수군절도사를 겸했다.
안국은 겉치레로 거드름을 피우며 세상을 속이는 속학(俗學)을 외면하고 실지로 행하며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실학(實學)에 힘썼다.

가정에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사회에서는 충절을 표본으로 삼아 세인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자 당대의 석학들이 문하에 그득하게 들어와 사표(師表)가 됐다.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자 각 고을을 순시하며 각 향교의 학도들에게 소학을 나눠주며 가르치도록 시를 지어 권장했다.
또 농민들의 생계부흥을 위해 농서(農書)·잠서(蠶書) 등 영농기술의 해설집을 만들어 농민의 증산의욕을 고취시켰고 수리시설, 지방조세제도의 개선 등에 앞장서 목민관〔고을의 수령〕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언해(諺解)한〈여씨항약〉은 국민들의 화합에 도화선이 되었고, 민간요법을 모은 가정의학해설집을 만들어 주민들을 계도했다.

저서로 동몽선습, 이륜행실, 강목고이, 역대요록, 속몽구, 천해록, 완심도, 예원한영, 사서소학, 근사록부주 등은 모두가 사람이 행동하는 규범과 예절을 강조하고 있다.
또 처음으로 물이끼와 당나무 껍질을 섞어서 종이를 만들었고 이 방법을 백성에게 알려서 만들어 쓰도록 했다.

1518년(중종 13년)에 조정으로 잠시 들어가 동지중추부사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자 임금은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가자(加資)해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제수했고, 귀국해서는 지경연(知經筵)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했다.
1519년(중종 14년)은 일대 소용돌이가 일어난 기묘사화의 해였다. 안국은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겸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그해 여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외직으로 나갔다.

그해 11월 중종반정의 공신과 훈구파의 모략에 의해 신진사류인 개혁파 조광조가 사약을 받아 죽고, 젊은 선비들이 하옥되는 기묘사화를 당했다.
안국도 당시 황해도관찰사로 있던 동생 사재(思齋) 정국(正國)과 파직을 당해 이천으로 낙향했다. 여기서 후학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글을 배우기를 청했다.

안국은 1528년(중종 23년) 다시 이곳을 떠나 여주시 이포로 옮겨 범차정(泛木差亨)과 팔이당(八怡堂)을 짓고 19년 동안 향인들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 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데 서스름 없이 행동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충정어린 행동이었다. 항상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생각은 그 당시 쓴 글로써 충분히 나타나 있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정당한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는 언제나 빛을 보는 것은 당연한 하늘의 이치이다.

1537년(중종 32년) 권세를 부리던 간신들의 몰락으로 다시 등용돼 상호군(上護軍)겸 동지성균관사로 들어가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까지 겸직하다가 중추부(中樞府)로 들어가 지사(知事)가 됐다.

이어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서 다음해 여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다. 화려한 관직을 두루 겸직하면서 능력은 더욱 돋보였다.
우참찬을 세 번이나 거치는 가운데 품계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와 세자빈객(世子賓客), 대사헌(大司憲)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그뿐 아니라 부총리급인 우찬성(右贊成)으로 영전하면서 영의정도 부러워하는 최고의 현직(賢職)인 문형(文衡)으로 홍문관·예문관(藝文館)의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다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이사(世子貳師)까지 겸직했고, 곧이어 좌찬성(左贊成)이 됐다.

1541년 특명으로 병조판서가 됐다가 판돈영부사를 겸직했고, 예조판서로 옮긴 다음 해는 세자이사가 다시 됐는데 이는《주역》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신도 안국을 흠모해 일본에 보내는 모든 답신을 지었는데 겨울에 병으로 세자이사를 사직하고 지중추부사가 됐다.

이때 임금은 의관(醫官)을 보내 어약(御藥)을 내려 문병했고, 세자도 궁인을 보내 위문했다.
병중에도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의 글을 몸소 지었다. 왕은 또다시 국법에 3공(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아니면 승지를 보내지 않았던 예를 무시하고 안국에게만은 승지를 보내 병의 상태를 알아보고 위로했다.

안국이 1543년(중종 38년) 1월 4일 타계하니 향년 66세였다.

부음을 전해들은 임금은 이틀동안 조회를 하지않고 시장의 문도 열지 못하게 했으며, 부의와 제사에 대한 의식을 특별히 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경기도 장단군 강남면 해촌리에 아버지이신 18世 연(璉) 선조님 묘 아래에 안장됐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는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렸고, 인종묘정(仁宗廟庭)에 배향하는 한편 여주에 사당(祠堂)를 지어 제향(祭享)케 했다.

모재공의 부인 정경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종실의 송림군(松林君) 효창(孝昌)의 따님으로 13년 후에 78세로 별세했다.

자식은 4남1녀로,
  1子 유부(有孚)는 전설사별좌(典設可別坐)
  2子 여부(汝孚)는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3子 재부(在孚)는 활인서별좌(活人署別坐)
  4子 연부(衍孚)는 관상감봉사(觀象監奉事)

그러므로 후손들은 문경의 시호를 받은 안국 선조를 중시조로 모시고, 문경공파(文敬公派)라 일컫는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사자료실 안내 [1] 관리자 2005-01-05 37540
71 내앞 집안의 독립투사들 [1] * 2005-04-02 8955
70 친족(親族) [1] ChanHong 2005-03-09 9068
69 문경공파는 모재 김안국 선조님이 중시조 ChanHong 2005-02-14 10373
68 대제학 김안국의 이모저모 ----- 이웃집 처녀 ChanHong 2005-02-14 9985
67 안국 1 --- 개혁정치와 그 역사적 성격------이병휴 * 2005-02-04 8112
66 안국 2 --- 모재의 인간 자세와 저술--------임형택 * 2005-02-04 8063
» 안국 3 --- 실체적 학문을 추구한 성리학자--김앙섭 * 2005-02-04 8331
64 인물살펴보기 ---- 중종때 대제학 김안국 ChanHong 2005-02-04 8571
63 모재가훈--모두가 힘쓸 때입니다 * 2005-01-24 8501
62 정속언해 --- 윤리와 도덕사회가 절실 * 2005-01-24 8675

  • 서울시 강서구 화곡5동 95-54 (신도로명주소:화곡로229)문소빌딩 5층 02)796-5322 fax 02)797-9511 eskim5323@naver.com
    Copyright by Internet Total Infomation Center (인터넷종합정보센터) All rights reserved. Powered by 김이오.넷 (金在洙)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