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탐구 1 --- 모재 김안국의 개혁정치와 그 역사적 성격

필자 이병휴(前 경북대 국사학 교수)


1. 머리말

우리의 인간이 역사에 어떻게 대응하였으며, 한 개인이 그의 시대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살았나 하는 문제는 역사와 시대정신 및 그 흐름의 과정을 살피는데 빼놓을 수 없는 과제이다. 그것은 인간 또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와 시대의 실체를 엿볼 수 있게도 해주지만, 돌이켜 보면 그들의 역사적 기능과 각 시대 안에서 위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 인물을 자기 시대 속에, 나아가서는 역사속에 자리잡게 함으로써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오늘의 문제의식, 현실인식을 통해 과거를 다시 해석하고, 재평가하는 것이라고 선배 학자들은 일찌기 설명한 바 있다. 격동과 변혁의 현실에 대응하는 여러가지 방식들을 볼 때마다 역사 속에 부각되어 있는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어떤 시사를 받을 수도 있고, 그것의 추체험을 통해 일정한 확신을 얻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모재가 살았던 때는 분명히 격동과 변혁의 시대였다. 한 평생 그 시대를 살면서 그가 대응해 나간 의식 및 자세와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진보적인 인물이 체득한 대응방식의 모형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뜻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시대가 그로 하여금 그같은 대응의식과 자세를 택하도록 작용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고, 그와 그의 동류집단의 전진적 개혁의지가 그 시대의 모습과 성격을 부분적으로 바꾸어 놓은 측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사림파와 그들의 개혁정치에 관심을 가져온 바 있으나, 그들 개개인에 관해 구체적으로 검토할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모재에 관해 살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아직 공간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원고를 발췌·축약하고 부분적으로 형편에 맞게 손질한 내용이다.


2. 개혁정치

모재는 성종 9년(1478) 태어나서 중종 38년(1543)까지 66년의 생애를 살았다. 그의 시대인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는 조선왕조사에서 격동과 변혁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다. 그가 태어나 경험한 성종의 치세는 사림파가 등장하여 훈구파와의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나름대로 개혁의 기운이 양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21세 되던 연산군 4년 무오사화의 참상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3년 후인 연산군 7년 그는 생원·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2년 뒤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환의 길에 들어선 그는 숭문원권지부정자로 출발하여 홍문관부수찬때 중종반정을 맞았다. 중종대에서 그는 승차를 거듭하여 중종 14년 전라도관찰사 때에 기묘사화를 맞았다. 그와 조광조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개혁정치는 주로 그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화로 그는 조광조의 측근으로 파악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19년간의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기묘사화 이후 흔히 '기묘 3간'이라 불렸던 홍경주·남곤·심정 등이 차례로 죽음으로써 사화를 주도한 인물들의 구심점이 분해되어 갔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정치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김안로의 권신정치가 그후 약간의 침체기였지만, 중종 32년까지 계속되었다. 같은 해 10월 그가 윤안인, 양연 등의 탄핵으로 사사되면서, 모재의 재등용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정월 그는 대간·홍문관 등 청요직에 기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동지성균관사에 보임되었다.

그는 중종 37년 10월 병으로 사직할 때까지 약 5년간 관직생활을 계속했으며, 그의 관직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존양(存養)과 성찰을 본체로 삼았던 김굉필 수기(修己) 지향적 학문은 그의 문인에서는 오히려 치인(治人) 우세의 성향을 띠고 나타났다. 그것은 중종반정 이후 전개되었던 개혁정치의 주체가 바로 기호(畿湖) 지방에 근거를 둔 그의 문인들이었던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모재는 조광조와 더불어 개혁정치를 이끈 두 계열 중의 한 쪽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들이 추진한 개혁정치를 살펴보면, 그것이 그들의 학문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재는《사서오경》등《경서》와《성리대전》등 성리학에 밝아, 성균관의 '사유가당인(師儒可當人)'으로, 혹은 '성리대전가강인(性理大全可講人)'으로 선발되었으며, 왕세자(인종)의 빈사(賓師)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인종 즉위 이전에 죽어서 그의 치세를 경험한 일이 없었음에도 특례로 인종묘정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성리학의 보급 범위나 학문적 원리에 대한 이해수준으로 볼 때, 그가 비록 성리서(性理書)에 정통하였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고, 이기철학(理氣哲學)에 대한 독창적인 이해체계를 수립할만한 경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가 당시의 학자들과 달랐던 것은 성리학 자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전고(典故)는 물론 천문·지리·음양서·의서(醫書)·불서(佛書)에서 유편비록(幽編秘錄)에까지 능통하였으며, 업무의 처리도 탁월한 능력을 지녔었다는 점이다.

그의 학문에는 자세와 취향에 대하여 후인들은 다소 엇갈린 평가를 한 것을 보게 된다.
윤근수는 "당시의 의논이 모재가 선(善)을 즐기고 선비를 사랑하며 전고(典故)에 널리 통용했으나 학문이 공에 이르러서는 그다지 공을 쌓지는 못하였다."라고 하였고, 이언적은 "모재가 학문에는 뛰어났지만 존양의 공은 적었다."라고 평하였다.
그리고 이식은 "돌아보건대 그가 박학하고 문장을 잘 짓기는 하였지만 약(約)을 지키는 공부는 적은 듯하다. 또 스스로 특이함을 표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세의 여론이 조광조의 심학정종(心學正宗)만은 못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모재는 세상에 드문 특이한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성품이나 생활 방식이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않고, 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과 쉽게 접촉하였다는 사실과 성리학에 그의 학문적 입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용적이고 실천지향적인, 당시로서는 잡학이라 여겨지던 이문(吏文)이나 천문지리서·음양서·의서 등에까지 폭넓게 관심을 보였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성리학적 윤리·도덕의 규범을 실천하고 보급하기 위해《동몽선습》,《이륜행실》등을 편술하였으며, 성리학적 향촌질서 수립을 위해《여씨향약》을 언해, 보급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이문정시(吏文庭試)에 거수(居首)할 만큼 능숙하였고, 그것은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결합되면서 일찍부터 외교문서 찬술과 승문원직에 진출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그의 학문과 현실대응은,

그의 학문은 반드시《주자》를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문장과 사업이 모두 일상생활의 사이에 있었고 고원하고 허황된 일에 뛰어나기를 힘쓰지 않았다. 매번 일에 당해서는 자세하고 확실하게 하였는데 세상을 구제하고 그 시대에 급히 해야 할 중요한 도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래서 모재를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항상 번쇄하다는 비방을 하였다. 사람들이 간혹 그런 일을 公에게 말하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보통 사람들은 마음이 거칠고, 성인은 마음이 세밀한데 어찌 정밀한 것을 버리고 거친 것을 쫓는 것만 일삼으면서 스스로 통달했다고 하겠는가?
라 한 사실에 잘 함축되어 있다.

모재는 일생동안 능동적인 현실대응 자세를 늘 견지하였으며, 그것은 곧 강력한 개혁의지로 표출되었다. 그의 현실개혁은 두 갈래의 접근 방향에서 시도되었다.
그 하나는 성리학적 통치질서의 수립에 장애가 될만한 낡은 제도를 개혁함과 아울러 과거에 버려졌으나 현실적으로 필요한 명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직접적이고 보다 구체적인 제도개혁론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통치질서 수립의 기반이 될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바탕의 조성이란 보다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향촌교화의 측면이다.

명분의 회복을 위한 그의 노력은 소릉복위(昭陵復位)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 온 노산군·연산군의 입후사(立後事)로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성종대의 사림파에서 그 단초(端初)를 찾을 수 있으며, 중종조 사림파의 개혁정치와도 괘를 같이 한 부분이다.

이 일은 중종반정 후 가끔 논의되어 왔으나, 동왕 11년의 단계에서도 미결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봉사손(奉祀孫)을 세운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륜과 인정이란 명분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노산군의 입후가 성사될 때에는 세조의 정통성에 간접적인 영향이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옹립한 공신세력의 입지가 약화되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연산군의 입후는 중종반정의 명분에 손상을 줌과 아울러 정국공신 세력의 정당성과 입지에 타격을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가 중종 11년에 와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게 된 것은 소릉복위 실현의 성과 위에서 사림파의 성장이란 현실적 세력변화가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림파에 의해 발의되었으나,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 문제가 잠재적으로 담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그 이유를 구할 수 있다. 당시 승지직에 있던 모재는,

이는 대신들과 함께 의논한 일이지 소신이 아뢸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만세의 의논에 관계될 일이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연산과 노산이 비록 폐위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성상 자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폐주(廢主)는 곧 지친(至親)이요 노산 역시 지친인데, 오랜동안 임금으로 있다가 천지 사이의 사나운 귀신이 되었으니 온화한 기운이 펼쳐지지 못하고 사나운 기운이 된 것은 필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라 하여, 승지직에 있던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여 조심스럽게 상계하였다. 이 논의는 그후 상당 기간동안 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으나 당시로서는 성취되기 어려운 문제였다. 표면상으로는 '흥멸계절', 즉 소멸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다는 명분이 표방되어 있었으나, 세조 즉위, 중종 반정의 당위성·정통성을 훼손할 위험이 내재해 있었고, 공신세력의 이해와도 맞물려 있었기 때문임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이 문제는 모재가 복관된 뒤인 중종 34년에 가서 묘지관리인을 보내고 나라에서 제수을 주어 제사를 지내게 하되 대를 잇는 사람은 세우지 않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진 바 있다.

이와 함께 모재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궁중의 재원으로서 인습적으로 존속해오던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 문제와 왕실에서 관행으로 봉행되어온 불교적 사전체제(祀典體制)인 기신재의 문제였다. 둘 다 성종조 이래의 정책적 과제로 되어 온 것이었다. 내수사 장리는 왕실 운영 경비의 조달을 위해 설치된 공적 재정기관으로서의 내수사가 자행한 탈법적 고리대금 행위로서, 이는 훈구대신의 사적 장리들을 보호해 준 방벽이 되기도 해서 성종조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중종조에 넘겨진 역사적 과제였다.

이 문제 역시 정국공신의 핵심세력이 분해되고 사림파가 언관(言官) 및 시종직에서의 우세를 확보한 중종 11년 6월에 혁파되었는데, 당시 모재는 부승지로서 경연참찬관을 겸하고 있었다. 그가 이 문제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나, 사림파 출신의 시종관으로서는 당연히 그 논의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것은 그가 별안간 불리어 온 자리에서 "요사이 기신재, 내수사 장리 등의 큰 일은 모두 이미 혁파되었는데 기은재(祈恩齋)는 아직도 남아 있으니, 이 또한 성스런 다스림에 커다란 누가 되옵니다"라 상계한 사실에서 짐작되는 일이다. 이 같은 성과는 사림파 개혁정치의 한 성공사례로 평가되기도 하나, 궁중의 후비세력과의 내면적 갈등을 빚어 후일 사림파 실세의 잠재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뿌리깊은 인습으로 남아 있던 기신재는 토착적·불교적·도교적 사전질서를 정리하고 성리학적 사전체제를 수립하려던 사림파의 처지에서 보면 당연한 혁파대상이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핀 장리문제와 함께 묶여서 논의되어 왔다. 성종조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이래 중종 11년에 와서 혁파되면서, 궁중세력 내지 불교세력과도 내면적 갈등을 유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외에도 모재는 과학강경규식의 개혁이라든가, 경연교육의 질적강화,《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이륜행실》의 간행·보급,《소학(小學)》 교육의 권장 등 성리학적 실천윤리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모재가 향촌정책에 기울인 관심과 노력은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주된 영역에 속한다. 조선 왕조는 건국초부터 향촌사회의 지배를 둘러싼 중앙권력과 향촌 재지세력간의 대립·갈등을 빚고 있었다.

전자로서는 향촌을 기층으로 지닌 지방의 장악을 통해 중앙집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고, 후자의 경우는 스스로의 세력기반을 유지·강화하려는 의지에서였다. 그러나 그 어느쪽도 독자적인 능력만으로는 향촌사회의 완전한 지배가 불가능하였다.

주부군현(州府郡縣) 이하의 향촌에까지 수령을 파견할 수 없는 한계능력의 중앙으로서는 그 곳을 불안정한 무정부상태로 방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또한 재지세력도 왕권지배하에서 독립적인 지배영역의 확보유지란 명분과 실제에 있어서 모두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점이 유향소(留鄕所)를 통한 양자의 공동지배형식을 취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적 추이에 따라, 왕권의 강약에 따라 양자는 일정한 함수관계를 유지하면서 그곳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 왔다. 그러므로 향촌의 재지적 기반 위에서 성장하여 중앙관료화한 사림파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에 대한 관심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관학(官學)에 의한 교육지배의 의도에서 중앙에 성균관과 사학(四學)을, 지방의 주부군현에 각기 향교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향교에는 교수와 훈도(訓導)를 파견하여 지방자제의 교육을 관장하게 하고, 수령으로 하여금 이를 독려코자 '수령칠사' 중에 '흥학'을 포함시켜, 이로써 고과포폄(考課褒貶)하였다.
그러나 사학(四學)과 향교의 부실은 성균관만이 제대로 교육기능을 행사하는 파행적 관학체계가 되게 하였다. 향교가 부실화한 요인으로는 국가 재정지원의 부족과 그로 인한 유능한 교수관 확보의 어려움, 서적난, 그리고 이들로 인한 교생의 부학(赴學) 기피 등을 들 수 있었다. 관학으로서의 향교가 지닌 이러한 한계가 재지세력의 서재(書齋) 교육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어, 조선초기의 교육은 관학과 사학(私學)의 상호보완에 의해 교육적 기능이 유지되어지는 체계가 되었다.

향교 교육이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현실은 모재에게는 더욱 큰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각 지방의 향교를 순회하여 권학하였다. 그는,

함양의 학자들에게 권하는 시에서 이르기를,
'김공이 다스린 교화요 정공의 고을이라 상숙(庠塾)의 학자들이 감화를 받아 모두 선량하구나. 소학 공부에 다시 힘써야 하리! 두 분 현자의 유범을 어찌 응당 잊으리오'
선산의 학자들에게 권하는 시에서 이르기를,
'일찌기 점필재의 교화를 거쳐 지금까지 돈후한 풍속이 남아 있도다. 바라노니 염락연원의 가르침을 더할 것이나, 상숙에선 먼저 소학 공부를 더 엄하게 하게나'
현풍의 학자들에게 권하는 시에서 이르기를,
'김선생의 학문은 세상에서 으뜸으로 받드는데, 염락의 여풍이 해동에 떨치도다. 고을에서 몸소 훈도받아 응당 얻음이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장차 소학을 더더욱 연구하게나'
안음의 학자들에게 권하는 시에 이르기를,
'성리학의 연원은 정선생이니 당시 이룩하신 정화를 공경히 생각하노라. 남기신 풍속은 정히 응당 덕행을 돈독히 하리니 모름지기 장차 소학을 더욱 닦고 밝히시게나'

라 하여 김종직·김굉필·정여창의 귀범을 지켜《소학》과 '염락연원지학' 곧 성리학에 면력할 것을 장려하였는데, 이 네 곳은 위 3인의 근거지 내지 수령 재직처였다. 은거중에서도 그는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향교의 실태를 개탄하면서 그의 복구와 흥학에 늘 유념하였다. 그가,

국가에서 문치의 운이 흥기한 지도 또 이미 백여 년 남짓 오래되었으니 학교의 일에 있어서는 유감이 없어야 마땅한 듯한데 구차한 것을 그대로 따르고 옛날의 비루한 것을 아직도 따르고 있는 면이 또한 더러 있으니, 어찌 성조에서 문과 교화를 숭상하는 다스림에 흠이 됨이 없겠는가? 공주는 충청 일도의 큰 읍이니 왕의 교화를 받들어 베풀어 여러 군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므로 응당 그 마음을 극진히 해야 할 것이고, 학교의 정책은 더욱 마땅히 급히 돌보아야 할 것이거늘, 여러 주들의 성대한 모습에 미치지 못하니 맡아서 다스리는 자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라 함에서 보면, 공주와 같은 커다란 읍(邑) 향교의 실태가 어떠하였나를 짐작케 하며, 이를 미루어 여타 작은 읍 향교의 실태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임금의 명령이 가장 잘 미친 가까운 지방 향교의 실태도 다른 지역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열악한 상태였다고 그는 개탄하였다.

향촌은 말단 행정구역이나 왕조의 기초적 지배기반이었다. 그러므로 군주나 중앙관료들이 향촌의 통제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기반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왕조의 통치체제를 안정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지적 기반 위에 성장한 사림파 역시 그곳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거기에 지지기반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중앙지배세력으로서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들에 의해 추진된 향약 보급운동은 그러한 각도에서 이해되고 있다.

중종조의 사림파에 의해 발의된 향약 보급운동은 선초에 치폐(置廢)를 거듭한 끝에 성종 19년 복립된 유향소 전통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향소는 '제활소(制猾所)', '정풍속'의 기능으로써 수령을 보좌하고 자문에 응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나, 실은 향촌에 재지적 기반을 가진 사림세력 주도의 향촌질서 수립에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사창제(社倉制)와 깊은 연관을 가진 것이나, 성종조의 사림파에 의해 복위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향촌이 안고 있던 개혁을 필요로 하는 많은 문제와 그것을 성리학적 가치관과 윤리질서·통치질서에 입각하여 해결하고자 한 재지세력의 의지가 결합한 결과라 하겠으며, 그에는 향촌사회의 안정 회복과 통치체제에 흡수라는 국왕과 관료세력의 현실적 욕구가 함께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향약은 중종 12년 함양인 김인범의 "여씨향약을 쫓아 행하여 풍속을 변화시키시옵소"라고 청한 상소와 중종이 의정부에 전교하여 '이풍역곡지방(移風易俗之方)'을 강구·논의하라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 뒤 모재가 상계하여,

신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그 도의 인심과 풍속을 살펴보니 퇴폐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따로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여 문적(文籍)을 찍어내고 있으니, 이러한 책들을 다시 더 교정하여 찍어내어 8도에 보급하게 하신다면 풍화를 힘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씨향약이나 정속(正俗)같은 책은 바로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책들입니다. 여씨향약이 비록 성리대전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주해가 없어 중국과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이 그 언해를 상세하게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보는 즉시 이해하게 하였고, 정속 또한 우리 글로 번역하였습니다.

라고 함을 보면, 그는 이전에 경상도관찰사 재직시 많은 서책을 도내에 인반(印頒)하였는데, 그중에는《여씨향약》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뒤 그것은 찬집청에 의해 국왕에게 진상되었고, 전국에도 비교적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홍문관 응교였던 한충이 충청도에서 직접 체험한 것을 "신이 고을의 아이들이 읽고 있는 향약을 보니 바로 김안국이 교정한 언해본이었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모재의 향약에 대한 이같은 노력은 사림파의 관심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광조도 그와 같은 의견을 개진하여 그를 뒷받침하였고, 김식은 "한 고을에 실시한 향약을 나라 전체에 시행하려면 그에 맞도록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한충은《소학》을 중외에 반급(頒給)한 것처럼《여씨향약》도 지방에 보급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이연경은 "신이 지방에 있으면서 향약을 보니 과연 풍습을 선하게 만드는 데 있어 신속하더이다."라고 상계하였고, 한충은 이연경이 충주에서 향약을 실시한 파급효과 때문에 충청도가 다른 읍에 비해 그 실적이 두드러졌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모재를 비롯한 사림파의 향약보급 노력은 그들이 중앙정계에서 차지한 세력비중 만큼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추진된 이 운동은 그들이 실세와 함께 원점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묘사화 직후 이구 "영남의 향약은 차츰차츰 염치를 알게 만들어 서로 훔치거나 빼앗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을 오래 시행하게 되면 그 효과는 장차 길에 잃어버린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상계한 것이 대간의 지속적인 탄핵대상이 되었으며, 지난 날 "향약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가장 좋은 것"이라 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던 중종이 "환란상구(患難相救)는 오히려 시행할만 하지만 그 밖의 잡다한 조목들은 거행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여, 향약의 덕목을 잡목(雜目)으로 인식하는 수준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향약은 제한적이기는 하였으나, 재지세력과 재지민(在志民) 그리고 중앙관료화한 사림파에 의해 시도되고 주도된 한국의 중세적 향촌 자치제였다. 그러나 정치권력에 의한 일방적 향촌지배를 통해 중앙집권을 추구하던 보수세력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따라서 성리학의 원리와 그에 의한 지배질서에 대한 인식수준이 향상됨과 아울러 사림파가 복권되고 정치적 주도세력으로서의 정착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대한 인식도 회복되고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이황의《예안향약》과 이이(李珥)의《해주향약》은 그 좋은 증거이다. 모재의 향촌사회에 대한 관심은 향풍의 교정, 유일의 천거 등 보다 많은 방면에 걸쳐 있었다.


3. 개혁정치의 성격

모재가 제의한 개혁론이나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는 곧 그의 현실 대응의식 및 자세로서도 그 성격을 가늠할 수 있겠지만, 그의 학문적 성향과도 무관하지는 않았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그는 조선유학의 맥을 잇는 성리학자이면서도 관념적·사변적인 원리 추구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

외교문서 작성 및 대중국 외교의 편의를 위해〈이문학관〉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한 것이라든가, 농사·질병·천재지변 등 농민층의 생활과 직결되는 농잠서·의서·음양서 등을 저술하거나 보급한 것은 그의 학문이 지닌 실용성·실학성을 반영한 좋은 예라 하겠다.

그리고 경상도관찰사 재직시 비안현을 순시하여 그곳의 농업생산성 제고와 그에게 파생되는 농민층의 잠재적 생활능력 향상을 돕고자 방죽을 축조하였다. 상평창제는 일찍부터 시행된 바 있으나 당시에는 유명무실한 실정이었는데, 이를 활용하여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돕도록 건의한 바도 있었다. 또 그는 수태지(水笞紙)라는 새로운 종이를 만들어 진상하고 이를 각 도에 보급할 것을 청하였으며, 스스로도 주위 사람에게 그것을 권유하였다. 그의 아우 사재(思齋)는,

우리나라에서는 종이를 만들 때 호정 뽕나무, 버드나무를 사용하는 데 모두 닥나무만 못하다. 닥나무는 비옥한 땅에 자라기 때문에 번성하게 나는 곳이 한정되어 있어 민간에서 날마다 쓰기에는 부족하다. 형님이 파직되고서 천영촌에 기거하며 수태지를 처음 만들었는데 그 방법은 수태를 건져서 여러 날 동안 햇볕에 쬐여 말리다가 색깔이 하얗게 변하기를 기다려 잘게 갈아서 수태 8푼에 닥나무 2푼을 섞어서 종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 종이 빛깔이 은은하게 푸르스름한데 마치 중국의 청화전 같고, 질기면서도 매끄러워 아주 좋으며 재료를 가꾸는 노력 없이도 무궁하게 얻을 수 있으니 그 이로움이 매우 많다.

라고 하여 수태지의 품질과 실용성·경제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같은 그의 학문적 성향이나 일상생활의 현장에 대응하는 방식은 곧 그의 개혁론과 개혁정치로 연결되어 그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남의 뜻을 잘 맞추어 아첨하거나 형식을 귀하게 여기고 귀족적인 사상을 존중하는 것보다는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였으며 추상적인 이념이나 가치를 지향하기 보다는 구체적인 실천과 방법을 유념하였다. 그것은 곧 지도층이 독점하는 혜택보다는 백성의 입장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의식과 자세는 그가,

학교의 일이 근래에 해이해졌으므로 상감께서도 이미 염려하셨습니다. 무릇 유생이 된 사람들은 반드시 실학을 읽은 뒤에야 이에 인성과 천명의 이치를 알게 되고 떳떳이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에 밝아지게 되는 것이니 상감께서 장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라고 상계한 것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나며, 정사룡은,

공부하고 자신을 닦는 데에 있어 고원한 쪽으로 흘러가지 아니하고 항상 일상생활의 사이에 있었다. 직책상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상세하게 골고루 갖추어 놓았다. ……고인들은 하루에 한 일은 반드시 하늘에 아뢰었으며 또한 국사를 보지 않은 날에는 반드시 저녁밥을 먹지 않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거늘, 내 어찌 구차하게 번거럽고 좀스럽다는 비난을 피하느라 직책상 맡은 일을 거행하지 아니하리오.

라고 하여, 그의 일상생활과 직책에 임하는 자세를 평하였다.
모재나 조광조 등 중종조의 사림파 모두가 확고한 개혁의지를 가지고 옛날 제도의 혁파와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에 열의를 보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약간씩 달랐다.
조광조도 "소학은 인재를 육성하는 근본이 되고, 향약은 풍속을 교화시키는 방도가 된다"라고 함에서 보듯이 소학 교육의 장려, 향약의 보급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그를 둘러싼 급진적 개혁론자들은 역시 구제도의 혁파와 새로운 제도의 수립이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이며, 가시적인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하여 모재와 그를 추종한 소수의 개혁론자들도 비록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제도자체의 개혁에 무관심하지는 않았으나, 주요 관심은 좀 우회적이고 간접적이며,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에 두고 있었다.

모재는 제도개혁보다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의 개선을 통해 성리학적 통치질서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이륜행실》《동몽선습》의 저술 및 보급, 소학 교육의 장려,《여씨향약》《정속》의 언해 및 보급, 향교 교육의 진흥 등 교육과 교화를 통한 향촌사회의 문화적 풍토쇄신, 향촌민의 심성 개량, 성리학적 도덕, 윤리 규범의 정착, 향촌의 자정력·자제력·자구력의 함양 등에 힘씀으로써 성리학적 통치이념으로 건국된 왕조의 이념에 부합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짧은 기간에 성취하려는 성급함을 나타내지 않았고, 점진적으로 개선하려 하였던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의 이러한 개혁방향과 방법은 상대적인 온건성을 띠고 있어서, 보수세력으로부터의 적대적 반응도 그만큼 적게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8년에 걸친 그의 긴 은거생활은 개혁에 대응하는 보수세력의 퇴행적 의식이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복직 이후 일생을 마무리할 때까지의 그의 관직생활은 5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시기는 김안로의 권신지배체제가 붕괴되고 기묘인(己卯人)에 대한 인식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가 지녔던 개혁의지를 그전처럼 적극적으로 펼칠 수는 없었고,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묘인을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그를 포함한 사림파의 개혁논리나 개혁정치는 성리학의 이해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그와 함께 사림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시점에 가서야 그 맥의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4. 맺음말

격동과 변혁의 시대라 할 성종초에서 중종말까지 살았던 모재는 연산군 시대에서 정1품직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중종조에 들어서 조광조를 비롯한 기호사림파가 성장하면서 그들과 함께 개혁정치를 펼치다가 반대세력에 의해 파직되어 19년의 긴 은거생활을 겪었다. 그뒤 권신 김안로의 실각과 동시에 복직되어 5년의 여생을 관직생활로 마무리 하였다.

그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어 받았으며, 그 이해 수준을 끌어 을리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의 관념적·사변적인 원리 추구에만 얽매이지는 않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외교문서의 찬술에도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문·천문지리·농업·의술·음양서 등 당시로서는 잡학이라 판정되면서도 실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는 실용적인 부문에도 깊은 관심과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에 이바지한 바가 매우 컸다.

이같은 그의 학문적 성향은 성리학에만 몰두해 있던 당시 또는 후세의 학자들로부터 그 한계를 지적 당하기도 하였고,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개혁론자로서의 모재가 추구한 방향은 대개 두 갈래로 나눌 수가 있다. 그 하나는 노산군·연산군의 입후와 같은 명분의 회복 문제와 종래 통폐로 여겨져 온 내수사 장리나 불교식 전례인 기신재의 혁파와 같은 낡은 제도의 개혁이었다. 그와 함께 과거의 강경규식의 부분적 개선, 경연기능의 강화, 주자가례의 보급, 소학 교육의 장려,《이륜행실》의 인반 등도 당시 사림파가 추구하고 있던 개혁정치의 테두리 내에서 그에 의해 주도된 중요한 범주였다.

그가 추구한 개혁의 다른 한 갈래는 향촌의 사회·문화적 풍토의 쇄신 및 그에 입각한 새로운 통치질서 수립의 기반 조성이었다. 국가가 관학체계의 하나로 설립하였으나, 실제로는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던 향교를 부흥하고 그 교육을 진흥하는 것은 곧 그 일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국가통치의 기초 단위이자 사림파의 재지적 기반인 향촌의 윤리질서를 성리학적 원리에 맞게 정립하고, 공동체적 자치능력을 제고함으로써 재지세력 및 중앙세력화한 사림파 주도의 향촌자치를 지향하는 방안으로서 향약을 보급하고 권장한 것은 더욱 중요한 범주였다. 또한 향풍의 교정, 유일의 천용 등도 그가 관심을 기울였다.

이처럼 그는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개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보다 큰 비중을 두어 노력한 것은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간접적이고 눈앞의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향촌정책이었다. 완만하고 온건한 개혁방향과 방법은 그의 희생을 덜어주고, 척신지배하에서도 그를 인종 묘정에 배향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또한 중종 임금으로부터 문경공의 시호를 받게 가능케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가 조광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폄하되게 만든 한계로도 작용하였다.

그의 개혁론과 개혁정치는 정치·사회적 제약, 역사적 하중로 인하여 살아 있을 때에는 큰 빛을 발하지 못하였으나, 사림파가 정치적 주도세력으로 정착하면서 지배층의 개혁논리로서 공감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 개혁의 맥은 국가차원의 시책으로 연장되었고, 그의 사람됨이 학문과 역사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의 큰 일을 당하면 몸을 돌보지 않는 인물"로 평가되기도 했고, "나라를 제집처럼 걱정한 이러한 인물은 오늘날은 없다."고 추앙되기도 하였다.
요컨대 그의 학문, 개혁론이나 개혁정치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역사 속에 확고한 좌표를 가진 개혁론자, 개혁정치가로서의 그의 일생과 현실 대응방식은 그와의 공시적 삶을 체험하게 해주며, 또한 그것을 통해 변혁의 현실에 대응하는 올바른 의식과 자세를 가다듬는 데 많은 시사를 얻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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