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살펴보기 ---- 중종때 대제학 김안국

19世인 모재 김안국께서는 조선조 성종 9년(서기 1478년 戊戌) 8월 6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휘 연(璉) 선조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을 지냈으며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 판의금부사(判議禁府事)에 증직(贈職)됐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양천허씨로 허지(許芝:영월군수 通政大夫吏曹參議)의 딸이다.

선생은 의성김씨로 고려조의 수사공공(守司空公) 휘 용필(龍弼) 선조가 10대조이며, 고조는 휘 호지(好智) 선조로 봉정대부(奉正大夫) 함흥소윤(咸興少尹)이고 증조는 휘 통(統) 선조이니 예조정랑의 벼슬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 예문관제학(藝文 提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 事)에 증직됐다.

조부는 휘 익령(益齡) 선조로 성천도호부사를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 事) 홍문관 예문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 事)에 증직됐다.

모재 선생의 휘는 안국(安國)이요, 자(字)는 국경(國卿)이며, 모재(慕齋)는 호이다.
뒤에 문경(文敬)의 시호를 받았다.

모재 선생은 뛰어난 총명으로 학문에 전념해 일곱 살 때 독서를 할 줄 알았고, 열다섯 살 때 정주학(程朱學)을 사모해 힘써 행하므로 문장도 이미 크게 성숙됐다.

조선조 때 실학(實學)의 대학자이며, 치정(治定)에 탁월한 실력을 나타낸 눈부신 업적을 남긴 모재 선생은 일찍이 일과(日課)로 지은 대유부(大游賦)가 회자(膾炙:널리 칭찬을 받음)에 올랐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애통한 사연과 수난을 겪어야 했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가 별세하고 열아홉 살에 어머니마저 운명하니 비운의 연속이었다.

효성이 지극한 모재·사재 형제는 부모의 묘소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를 무려 6년, 모재 선생은 애절한 심정을 금치 못하고 친히 갈문(碣文)을 지어 묘 앞에 세우며 애통해 했다. 그러면서도 학문에는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재 선생은 24세였던 연산군 7년(1501년 辛酉) 진사(進士)와 생원(生員) 양시(兩試)에 1위로 뽑혔으나 시관이 양시장원을 모두 한 사람에게 줄 수 없다 하여 진사에만 장원을 했으니 학문적 자질을 익히 알 만한 일이다.

2년 후인 연산 9년(1503년 癸亥)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2등으로 올라 벼슬길에 나섰다.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시작해 정자(正字), 다음해 저작(著作) 주서(注書) 춘추관·홍문관을 거쳐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해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직하고 있을 때 기묘사화로 일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선생의 실력을 인정받아 곧바로 기용돼 1506년(丙寅)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에 발탁됐으며 승문원교검으로 시강원사맹(侍講院司孟)을 겸직하고 있을 때인 그해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은 선생을 홍문관부교리(弘文 副校理)로 임용했다.
일취월장 내직을 두루 거치면서 중종 6년(1511년 辛未)에는 일본 사신으로 온 시승(詩僧) 팽중( 中)의 선위사(宣慰使)로 나갔고 다음해에도 팽중이 오니 선위사로 그와 자리해서 시를 겨루었다.

이때 팽중은 선생의 뛰어난 시문에 감탄해 돌아가면서 노생(老生)이 중국과 유구(琉球)를 두 번, 귀국을 세 번이나 다녀 만나본 사람들이 많았는데 공 같은 분은 보지 못했다면 존경하였다.

이황〔퇴계〕과 이언적도 자주 선생을 찾았는데 퇴계는 젊을 때 여주 이포를 찾아 선생을 칭송하기를 '바르고 군자 같은 사람의 도리를 선생에게 처음 들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대사간(大司諫)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를 거쳐 중종 12년(1517년 丁丑)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병마수군절도사를 겸임했다.

이때 소학(小學)을 널리 가르치도록 하는 한편 윤리도덕을 지키게 하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농민들을 보호하고 농사를 짓는 법, 누에를 기르는 법 등을 보급했다.

당시 의성에 온 선생은 첨사공〔龍庇〕을 모신 진민사(鎭民祠)를 중수하고 축문을 지어 봉향(奉享)하도록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한편 조세로 받아들인 정부미를 보관하는 창고를 충주에 지어 백성들의 노역을 없애고 양곡의 손실을 막기도 했다.

다음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조정에 들어가 명나라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다녀오면서 귀중한 여러 가지 서적을 구입해 연구케 했다.

그 해 임금의 특명으로 공조판서에 제수됐으며 겨울에 지경연동지성균관사(知經筵同知成均 事)를 겸직했다.

중종 14년(1519년 己卯)은 선생에게 수난의 해였다.
이 해 들어 의정부우참찬과 홍문관제학(弘文 提學)을 겸직하고 있다가 여름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을 때였다.

그 해 11월 피비린내 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수구파가 신진사류인 조광조 등 일파를 모함해 사사(賜死)한 일대 옥사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모재 선생도 이 당시 연좌되어 파직 당하고 이천으로 내려가 은거하니, 곳곳에서 찾아온 학자들이 날로 늘어 배움을 청하니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은일정(恩逸亭)'이라 했다.

그러자 훈구파 세력들이 여기저기에서 협박까지 했지만 선생은 이에 굽히지 않았다.

모재 선생은 중종 23년(1528년 戊子) 이천에서 여주의 이포로 옮겨 범차정(泛木差亭)과 팔이당(八怡堂)을 짓고 19년 동안 귀천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과 대화를 했다.

모재 선생은 간신들이 벌을 받아 죽게 되자 중종 32년(1537년 丁酉) 다시 발탁돼 상호군(上護軍)으로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 事)를 겸직하면서 조정의 중신으로 활약하게 됐다.

선생은 중종 35년(1540년 庚子)에 우찬성을 거쳐 온 백성과 만조백관이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학자의 최고 화려한 직책인 문형(文衡:兩 大提學)의 위에 제수됐다.

바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과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직했다. 그 해 가을에는 좌찬성에 승진됐다.

이어 병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중종 38년(1543년 癸卯)에 병석에 눕자 임금이 승지를 시켜 문병했다.

이같이 화려한 직책은 거의 임금의 특령으로 발탁됐던 것이다.
와병 중에 삼공(三公:지금의 국무총리·국회의장·대법원장)이 아니면 문병에 승지를 보내지 않는데 임금이 승지를 보내 쾌유를 빈 것은 삼공과 같은 예우를 하게 된 것으로 선생께서《주역》등 학문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그 해 정월 4일 끝내 쾌차하지 못하고 별세했으니 향년 66세였다.
임금은 선생의 부음을 듣고 2일 동안 조회와 시장을 폐하고 엄숙하게 장례를 치르게 했다.

1543년 3월 29일 장단해촌(長湍海村)의 선영에 장례지내니 봉상시(奉常寺)에서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어 인종묘정(仁宗廟庭)에 배향(配享)됐으며 여주에 기천서원(沂川書院)을 세우고 지금까지 봉향하고 있다.

부인은 정경부인 이씨로 종실(宗室)의 송림군(松林君) 이효창의 딸이다.
선생의 사적을 더듬으면서 더욱 존경심에 머리가 숙여진다.

필자 : 전 종친회 홍보교육간사 김 앙 섭

출처 :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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