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앞 집안의 독립투사들

조회 수 8960 추천 수 181 2005.04.02 15:36:39

▶ 내앞 집안의 독립투사들  

    의성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무려 100여 명에 달하고 문집을 남긴 인물이 9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문명(文名)이 높은 집안이다. 그러나 이들의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다. 청계가 후손들에게 ‘벼슬은 정2품 이상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 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기 때문이다.

높은 벼슬에 집착하기보다는 향리의 서당과 서원에서 글을 읽으며 자족하는 처사(處士)의 삶을 보낸 사람도 많다. 벼슬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면세계를 다지는 내공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의리정신은 구한말 의병운동과 만주 독립운동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내앞 사람들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별도의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로 방대하다. 청계공 탄생 500주년(2001년 2월)을 기념하는 학술논문집에 수록된 조동걸 교수의 논문 ‘안동(安東) 천전문중(川前門中)의 독립운동’이란 내용 중에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다.

내앞에 살던 66세의 백하(白河) 김대락(金大洛, 1845∼1914년)은 경술국치(1910년)로 조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자 엄동설한인 12월24일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다. 이 노선비는 서간도에 갈 때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만삭 임신부인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간다. 일본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데 이를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하일기’에 따르면 목적지 유하현으로 가는 도중인 1911년 2월2일과 23일에 손부와 손녀가 해산을 한다. 엄동설한의 눈밭에서 난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병원도 약도 구할 수 없어 버선과 신발이 얼어붙을 정도로 동분서주하고, 마을 성황당과 칠성님께 비느라 손발이 얼어터지는 참담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김대락은 증손자의 이름을 중국(唐)에서 태어나 통쾌하다는 뜻으로 쾌당(快唐), 외증손자는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의 고장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기몽(麒蒙)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문중 원로가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더구나 만삭인 손부와 손녀가 뒤를 따르는 걸 보고 감명을 받은 내앞 사람 22가구 50여 명이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이런 걸 보면 양반은 그냥 양반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내앞 출신의 독립투사 중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는다면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이다. 일송은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때 부의장은 안창호, 윤해였다.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수습하는 회의마다 거의 의장을 맡다시피 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송이 향년 60세로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평소 일송을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그 유해를 수습하여 성북동 심우장에서 화장을 한 후 유언대로 한강에 뿌렸다.

월송(1877∼1950년)은 김대락의 아들이다.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을 하던 도사택(都事宅)에서 태어나 협동학교(協東學校) 교사를 하다가 아버지와 대소가 안팎 식솔 수십 명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8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의 당시 개회식에서 사회를 보았다. 노년에 금강산에서 휴양중(1950년 가을) 전화가 미치자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며 구룡폭포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향년 74세. 자진하면서 남긴 절명시는 이렇다.

‘이 산에 응당 신선이 있을 터인데, 육안으로는 분간이 어렵구나. 백발 노인이 구름 사이로 치솟으니, 사람들은 나를 신선이라 하겠구나(此山應有仙 肉眼不分看 白髮聳雲間 人謂我神仙).’

내앞 사람들의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협동학교가 있었다. 협동학교는 내앞에서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산실이었다.


김시혁

2005.12.25 13:58:11

지금 6월은 보훈의 달. 보훈처가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분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 기림은 독립운동을 기리는 것뿐 아니라 그분을 통해 오늘에 교훈을 받고자함도 있을 것이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이 바로 그렇다. 현재 우리나라 지도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헌신과 통합일 것인데, 일송 선생이야말로 일생을 통해 이를 실천하심에 우리 독립운동 사상 가장 드높은 지위에 있는 분이라 하겠다.

일송 선생의 독립운동은 투철한 '무장 적극 투쟁'노선이었지만 그 실천은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그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는 만주 우리 동포들의 통합이었다.


선생은 의병과 유림의 고장 안동에서 혁신유림의 선봉에 서서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인 협동학교의 창설에 참여했다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가 고향 선배이며 인척이기도 한 석주 이상룡.백하 김대락 선생, 그리고 이회영.이시영 선생과 합류해 경학사.부민단.백서농장.서로군정서.신흥무관학교.대한통의부 등을 조직해 갈래가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동포들의 통합에 몸 바쳤다. 선생은 이상룡 선생 등 선배 등을 받들고 참모장 등 실무를 도맡아 독립군을 양성해 전투에 참여시키고 동포들의 교육과 생업을 뒷받침했다.


독립운동 사상 단 한 차례인 1923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가의 전체가 상하이(上海)에 모인 국민대표회의에서 선생은 투표로 의장에 선출됐다. 우여곡절 끝에 선생이 의장에 선출되자 부의장에 선출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선창으로 '김동삼 만세'가 회의장을 진동했다고 한다.


선생이 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유해를 자신의 심우장으로 모시고 장례를 치렀는데 이를 김관호 선생이 기록해 후일 만주에서 귀국한 후손에게 주었다. 기록하기를 "만해는 통곡하며 '유사지추에 이분이 아니고는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하여 '독립운동가 모모씨 등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반문하자 '그런 분 백, 천이라도 이분을 당할 수 없고 도리어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해방 뒤의 그 복잡한 분열상을 예견하고 통합의 인물을 아쉬워함이 아닌가 한다.


선생의 생애는 헌신으로 일관했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안동 의성 김씨 일문과 함께 재산.명문 등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 밭 갈고 싸우고 가르쳤다. 당시 안동지방에서 선생과 함께 만주로 간 분이 대충 500여 명이 될 것이라고 조동걸 교수는 본다. 이들은 아들.딸.형제는 물론 처가.외가 등 집안 친인척이었으니 오늘날 공직자의 자녀가 국적을 버리는 세태와는 사뭇 다르다. 선생과 함께 고생하다가 사돈이 된 이원일 선생의 회고록에는 "선생은 담요 한 장을 메고 싸구려 좁쌀 떡으로 끼니를 때우고 겨울에도 싸이혜라는 여름신발을 신고 백여 리씩 걸으며 동포들을 찾아다녔다"고 썼다. 선생은 8년 동안 형무소에 있으면서도 옥중 투쟁을 쉬지 않았다.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같은 형무소에 있던 김철수씨의 회고로는 "형무소 안의 죄수들이 단식 투쟁을 하며 '용수를 쓴 저분(일송)에게 물어보라'고 당황한 일제 간수에게 말하면 선생은 형무소장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도록 했다"고 한다.


선생은 "나라를 잃은 몸이 무덤은 남겨 무엇하냐. 나 죽거든 불살라 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에 떠돌며 조국이 광복하는 것을 지켜보리라"라고 유언해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다. 선생은 무장 독립운동가답게 기록 한 줄, 사진 한 장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돈이 없어 면회를 못 가는 가족이 선생이 빠진 채 찍은 사진을 형무소로 보낸 것이 한 장 있고, 고향의 남은 땅을 처분해 독립운동에 보태라는 편지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올해 선생이 보수적 전통 유림으로부터 혁신유림이 되어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한 협동학교가 있었고, 선생이 100년 전 처자식.형제.문중을 모시고 이끌고 독립운동을 위해 떠났던, 그러나 꿈에도 그리워 했을 500년 이어온 고향 마을인 안동 내앞(川前)에 민족운동기념관이 착공된다.


그러나 이보다 선생을 진실로 기리는 것은 나라를 위한 헌신과 통합을 후손들이 배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 차관 (2005, 6월 17일 중앙일보에 기고,)

P,S, 협동학교 는 초등교육이 아니고 중등교육기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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