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는 한국의 유학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신 김창숙 선생님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 daum(다음)

본관 의성(義城). 자 문좌(文佐). 호 심산(心山)․벽옹(펼翁). 경북 성주(星州) 출생이다.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9년(융희 3)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 육영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휴대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인《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원[孫文]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6․25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하야(下野)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김성수(金性洙)․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하여 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2년 노환으로 죽은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Chollian(천리안)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 본관은 의성(義城).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생.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으며, 1909년(순종 3)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하고 을사오적매국성토상소사건(乙巳五賊賣國聲討上疏事件)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하고 유림(儒林) 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이듬해 귀국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유림단사건의 연루자로 경찰에 투옥되었다.
그 후 출옥하여 22년 베이징[北京]에서 신채호(申采浩)와 같이 독립운동지《천고(天鼓)》를 발행하고, 박은식(朴殷植) 등과《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 쑨원[孫文]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으며 광복운동을 위하여 분투하다가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8․15를 맞았다.
광복 후 민주의원을 지내는 한편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재단법인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교를 창립, 초대총장에 취임하여 사학(私學) 육성에도 힘썼다.

6․25 후에는 이승만(李承晩) 하야 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고, 52년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이승만 정권에 투쟁하였다.

저서에 《심산만초》 《벽옹만초》 《심산유고(心山遺稿, 1973)》 등이 있다.


● netian (네띠앙)
생몰연대 : 1879. 7.10. ~ 1962. 5. 10.
선생은 1879년 7월 10일 성주군 대가면에서 호림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호는 심산 혹은 일제에 의한 고문으로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여 지체 부자유의 앉은뱅이가 되었으므로 자칭 벽옹이란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18세 이후에는 당대의 이름난 학자인 이종기, 이승희, 장석영 등을 찾아다니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하지만 당시 나라안팎의 어수선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세속학자들이 한갓 성리의 오묘한 뜻만 떠벌릴 뿐 시급한 구국책을 강구하지 않음을 알고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성인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가짜 선비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따위 가짜 선비들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치국평천하의 도를 논하는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여 민족 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선비가 아니라 그 문제 해결에 솔선 수범하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신념은 을사특약의 체결을 계기로 격렬하게 표출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광무황제의 통치권이 현저히 손상되는 망국적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때 선생은 스승인 이승희를 따라 상경하여 대궐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려, 조약 체결에 적극 동조한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등 배신(背信)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선생은 통곡하며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선생은 전국단연동맹회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것마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선생은 성주 지방에서 모은 단연금을 기금으로 자신의 선조인 동강 선생을 모신 청천서원에 사립성명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07년 6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이어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망국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민족 자위력이 박탈되고, 정부 각부의 한국인 대신 아래 일본인 차관이 앉아 제멋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등 우리나라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형편이었다.
이같은 위기상황속에서 해산군인들과 일반 민중들이 대거 의병투쟁에 참여하였고 장기적인 국권회복운동 전략으로 진행되고 있던 구국계몽운동 역시 한층 고조되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일으키기에 우리 민족은 온갖 정열을 바쳐갔다.

선생은 당시 "나라가 곧 망하겠다. 지금 문을 닫고 글만 읽을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에 설치하고, 그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때 선생은 "우리들이 이 모임을 만든 것은 장차 조국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조국을 구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구습의 혁파부터 시작해야 하며, 구습을 혁파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계급 타파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계급을 타파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우리의 이 모임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봉건적 신분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혁신적 유학자로서 선생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이는 성리학적 신분 질서에 집착하고 있던 당시 유림들의 인식 전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통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선생은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고 울분을 토로하면서 즉각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중추원에 제출하고, 또 각 신문지상에 발표함으로써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선생은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고, 성토문의 취소를 강요받았지만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통분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미친 듯이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학문을 닦으면서 서서히 우리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되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곧 너의 나아갈 길이다."라고 하신 모친의 말씀을 듣고 느낀바 있어 이후 오직 독서와 학문연구에 전념하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에 의해 민족자결주의가 천명되고 그해 11월 11일 공식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졌다.
우리 민족은 이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획득하고자 국내외에서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였다. 선생은 모친의 병환으로 상경을 미루다가 이같은 독립선언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결국 3.1독립선언은 유교계 인사들이 빠진 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민족대표들만으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인데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선생은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파리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국 대표들에게 호소해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한다면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선생은 스승이자 영남 유림의 영수인 곽종석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는 한편 파리장서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유림대표들의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서유림도 거의 같은 동기와 목적에서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알게되어 양측은 공동으로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곽종석, 김복한 및 선생 등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하는 독립생존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울러 이를 선생으로 하여금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선생은 3월 23일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용산역을 출발하여 중국 안동과 봉천을 거쳐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이 시기 상해 독립운동계에는 3․1운동에서 표출되고 있는 민족 독립의 열기를 수렴하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지도 통괄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전개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시영, 신채호, 이동녕, 신규식 등과 임시정부 설립문제를 논의한 뒤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 구성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경상북도 의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공헌하였고, 나아가 교통위원회 위원으로서 활동하면서 안창호를 도와 연통제를 실시하는데 협조하였다.
이후 선생은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 국민당의 손문을 비롯하여 오산, 서겸, 장병린 등과 교류하면서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설득하고, 이들과 함께 광주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0년 8월말 광주에서 다시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중국 공교회 회원인 임복성의 자금지원으로 박은식과 함께『사민일보』를 창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고, 한중 양민의 혁명사상을 고취하여 갔다.
그리고 선생은 1921년 1월 북경으로 옮겨와 신채호가 박숭병과 함께 발행하고 있던『천고』라는 잡지의 편집을 도와주면서 국내에 사람을 보내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특히, 같은해 4월 선생은 신채호, 김원봉, 이극로, 오성륜 등과 함께 1919년 2월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우리나라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을 규탄하는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여 절대 독립론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통할기관으로 만들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개편문제를 둘러싸고, 기존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여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하자는 개조론과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최고 통솔기관을 조직하자는 창조론으로 의견이 갈리어 서로 반목 갈등하는 모습을 노정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여러차례 국민대표회의의 출석을 요청받았고 또한 창조파에 의해 국민의회 대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하였지만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선생이 예견한대로 국민대표회의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독립운동세력의 혼란과 분열만 가중시킨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선생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희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 방략을 추진하였다.

국내외 독립운동이 매우 침체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선생은 김구, 이동녕, 유자명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국내의 정세를 설명하면서 청년 결사대들에게 자금을 주어 무기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가 왜정기관을 파괴하고 친일부호를 박멸하여 한번 국민의 의기를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김구와 유자명은 적극 동조하면서 행동대원으로 의열단원인 나석주를 추천하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게 한 뒤, 천진에서 나석주를 만나 이를 전해주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나석주를 국내에 잠입시킨 뒤 선생은 상해에서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런와중 신병으로 상해 병원에 입원중에 일경에 피체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특히 선생은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논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변호사의 변론을 거부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일본인 재판장이 본적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냐"며 되묻는 등 재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선생은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비상 국민회의 최고 민중지도자,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반탁 민주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1946년에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총본부를 조직하면서 그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선생은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여 학장,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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