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호(諡號)는 어떻게 정하여 졌을까?

시법(諡法)은 왕조시대(王朝時代)의 한 제도이며, 문무관(文武官) 유현(儒賢) 사절(死節)의 한 평생을 공의(公議)에 따라 엄정하게 평론(評論)하고 행적(行蹟)의 대표적인 일을 뽑아 두 글자로 요약하여 죽은 개인의 선악(善惡)을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권장하고 징계하였음에 의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시호를 정하는 절차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엄격한 절차에 따라 시호가 정해졌다.
국왕이 아닌 일반인의 경우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하여 증시(贈諡)하였는데, 그 절차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시호는 어떤 사람들이 받는가?

종친(宗親)이나 정2품 이상의 문무관(文武官), 비록 직위는 낮더라도 친공신(親功臣)에게 시호(諡號)를 주도록 규정하였는데 대제학(大提學)은 종2품, 유현(儒賢)이나 사절(死節)한 자(者)로서 세상에 드러난 자는 정2품이 아니더라도 특별히 시호를 주었다.
시호는 생존시의 행적(行蹟)에 의하여 국왕이 내리는 이름이다.
시호를 내리는 것을 증시(贈諡)라하고 후대에 추증(追贈)하여 시호를 내리는 것을 추시(追諡)라고 한다.

2. 조선시대 시호 제도

우리나라에서의 시호는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 기록되고 있다. 삼국(三國),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시호제도나 범위 등은 상고(詳考)할 수 없다.
시호제도(諡號制度)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조선조에 와서 정비되었다.
문무관(文武官), 유현(儒賢), 사절(死節) 등 일반인은 봉상시에서 주관하여 증시(贈諡)하였다.

-- 시호를 받을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이나 인척 등이 행장을 작성하여 예조에 제출함.
-- 예조에서 행장을 검토하고 봉상시로 보냄.
  봉상시에서는 행장에 근거하여 합당한 시호를 평론하여 세 가지 시호를 정하여 홍문관으로 보냄. 이를 시장(諡狀)이라 함.
-- 홍문관에서는 응교 이하 3인이 삼망을 의논한 뒤 응교 또는 부응교가 봉상시정(奉常寺正) 이하 제원(諸員)과 다시 의정(議定)하며,
  의정부에서 서경(署經)하여 시장과 함께 이조(吏曹)에 넘김.
-- 이조에서는 시호망단자를 작성하여 국왕에게 입계(入啓)하여 수점(受點)을 받음
-- 국왕의 수점 후에 대간의 서경을 거쳐 확정됨.
-- 국왕의 특별한 교지로 시호를 주는 경우에는 예조(禮曹)에서 행장(行狀)을 접수(接受)함이 없이 홍문관에서 직접 정일(定日)하여
  봉상시(奉常寺)에서 합석(合席) 부대시장(不待諡狀) 합의를 이루어 곧바로 시호를 내리는 예(例)도 있었다.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이간(李柬)에게 문정(文正)으로 시호가 하비(下批)된 경우가 그렇다.


이순신의 경우 봉상시에서 의논한 세 가지 시호는 충무(忠武), 충장(忠壯), 무목(武穆)이었다.
이때의 각 글자의 뜻은,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쳐들어오는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무(武)라 하고,
  적을 이겨 전란을 평정함을 장(壯)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로움을 굳게 지킴을 목(穆)이라 풀이하였다고 한다.

3. 시호에 쓰이는 글자

봉상시에서 시호에 쓰는 글자는 사기(史記)의 시법(諡法) 194자였다.
1438년(세종 20) 시호에 쓰이는 자수(字數)의 부족으로 시의(諡議)에 있어 사실에 맞게 하기 어려운 점을 들어 증보(增補)할 것을 상계(上啓)하여 세종(世宗)의 하명(下命)으로 집현전에서 의례(儀禮),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참고하여 107자를 추가하였다.
이로써 시법에 쓸 수 있는 글자는 모두 301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 정(貞) 공(恭) 양(襄) 정(靖) 양(良) 효(孝) 충(忠) 장(莊) 안(安) 익(翼) 무(武) 경(敬) 등 120자 정도였다.
한 글자의 뜻도 여러 가지로 풀이되어 시호법에 나오는 의미는 수 천 가지라 할 수 있다.

예를들어 문(文)자는

  경천위지(經天緯地)---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
  근학호문(勤學好問)---배우기에 부지런하여 묻기를 좋아한다.
  도덕박문(道德博聞)---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
  충신애인(忠信愛人)---충과 신으로 남을 사랑한다.
  민이호학(敏而好學)---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한다

등 15가지로 쓰였습니다.

시호(諡號)에 쓰인 글자가 악(惡)하고 사나운 행적(行蹟)의 사람에게 쓰인 글자라고 하여서 상청(狀請)을 사퇴(辭退)하고나 개시(改諡)를 청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개시(改諡)된 기록을 볼 수 있다.
시호가 모두 좋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각 성씨의 종친회에서 나쁜 시호를 받은 경우는 높은 관직에 올랐더라도 아예 그 사람의 이름조차 거론하기를 꺼리며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전의이씨화수회(全義李氏花樹會)에서 간행한 "전의예안이씨천년사(2000년 간행)"라는 책자에 좋은 뜻을 담고 있지 않은 시호를 받은 이숭지(李崇之)라는 인물을 과감하게 기록하여 고정관념을 깼는데 한 예를 보자.

 1462년(세조 8) 5월 29일 세조실록의 기사에서,
 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숭지(李崇之)가 졸하였다.
 1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쌀·콩 아울러 20석, 종이 1백 권, 유둔(油芚)·관곽(棺槨)을 부의하고,
 시호(諡號)를 과려(**)라고 하였으니, 좋게 꾸미어 말하지만 실상이 없는 것을 "과"라 하고,
 난폭하고 교만하여 친한 이가 없는 것을 "려"라 한다.

<참고>
이숭지(李崇之) ? ∼1462년(세조 8)
조선 세종∼세조 때의 정치가.
본관은 전의(全義), 영의정을 지낸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1418, 靑松人)의 사위이며 군사(郡事) 이강지(李剛之)의 동생.

여러 벼슬을 거쳐 문종이 임금에 즉위한 1450년 승지에 임명되고 1452년(문종 2)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에 올랐다.
1454년(단종 2)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이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호조참판(戶曹參判),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지내고 1462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졸하였다.

4. 시호 교지가 보존이 잘 안되는 이유와 시법의 역할

시호를 상가(喪家)에 내릴 때에는 1421년(세종 3)에 마련된 책증의(策贈儀)에 따랐다.
상주(喪主)가 책증의식(策贈儀式)에 따라 시호를 받으면 영좌(靈坐)앞에 봉안(奉安)하고 분황례(焚黃禮)를 행한다.
분황례는 시호교지(諡號敎旨)를 불사르는 것으로 이때의 교서(敎書)는 붉은 종이에 썼다.
시호교지가 거의 보존이 안되고 있는 것은 분황례에 따라 불살렸기 때문이다.
시호는 이렇듯 경건(敬虔)하고 엄숙한 절차와 의식(儀式)에 따라 해당자 가문(家門)에 전해졌다.

참고문헌 : 이기호(李氣浩), 「조선(祖先)의 시호 고찰」, 「인경휘보(仁敬彙報)」7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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