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우수성

조회 수 7872 추천 수 148 2005.01.11 07: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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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온실]도 한국이 세계 최초



세계최초라는 독일 것보다 170여년 앞서

(독일 것은 극히 초보적인 것)

15세기 온실 기록 발견...2002년 온실복원

보온 효과 평균 10도 이상 , 야간에는 25도 이상

우리 민족은 쌀 위주의 식생활에 채소를 즐겨 먹었다.

그러나 [3한4온]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기후는 계절 변화가 뚜렷하여 겨울에는 채소 생산이 불가능하다.

겨울철에도 채소를 먹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농기법이 필요한데

바로 겨울철에도 채소가 자랄 수 있는 온실을 만드는 것이다.

1450년대에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옛 농서(農書)가 2001년 10월에 발견됐다.




놀랍게도 우리나라는 겨울철에 신선한 야채를 먹을 수 있는 온실 건설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다 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조선초 세종-세조년간의 의관(의사)인 전순의(全循義)가 세종 때인 1450년대에 편찬한 ‘산가요록(山家要錄)’이라는 옛 농서(農書)가 2001년 10월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의학의 3대 저술 중에 하나인 『의방유취』를 공동 편찬했으며 당시로선 가장 권위 있는 의사며 식품학자였다.



             겨울철 채소재배하는 요령 구체적 기록


‘산가요록(山家要錄)’의 중요성은 온실을 만들어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를 생산했다 는



소위 동절양채(冬節養菜 - 겨울에 채소를 기르다)의 요령이 구체적으로 적혀있다는 점이다.



겨울철에도 채소가 자랄 수 있는 온실 을 만드는 것인데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적힌 동절양채(冬節養菜)에 대한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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造家大小任意三面築蔽塗紙油之南面皆作箭
窓塗紙油之造突勿令煙生突上積土一尺半許
春菜皆可載植於夕令溫勿使入風氣天極寒則
厚編飛令掩窓日瑗時則撤去日日酒水如露房
內常令溫和有潤氣勿令土白乾又云作(光)於築
外掛釜於壁內朝夕使釜中水氣薰扁房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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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임의의 크기로 온실을 짓되,



삼면을 막고(蔽)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塗紙油之).



남쪽면도 살창을 달고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



구들을 놓되 연기가 나지 않게 잘 처리하고



온돌 위에 한자 반 높이의 흙을 쌓고 봄채소를 심는다.



건조한 저녁에는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되,



날씨가 아주 추우면 반드시 두꺼운 날개(飛介: 오늘날의 멍석과 같은 농사용 도구)를 덮어 주고



날씨가 풀리면 즉시 철거한다.



날마다 물을 뿌려주어 방안에 항상 이슬이 맺혀 흙이 마르지 않게 한다.



담밖에 솥을 걸고 둥글고 긴 통을 만들어 그 솥과 연결시켜



저녁으로 불을 때서 솥의 수증기로 방을 훈훈하게 해 주어야 한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 정부의 후원 하에



2002년 2월 22일 경기도 남양주시 서울종합촬영소에



세계최초의 과학영농 온실을 복원 하는데 성공했다.





이 기록을 통해 겨울철에 꽃과 채소를 재배하여 궁중에 진상했다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기록들에 대한 의문점이 모두 해소되었으며



온실의 모형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겨울에 꽃 기른 기록


특히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의해 15세기에 한국에서 건설된 온실의 기록은



이제까지 세계 최초로 알려졌던 161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극히 초보적인 온실보다



연대순에서 무려 170년이나 앞선다.



훈민정음 금속활자 측우기는 물론 비거(飛車)와 신기전과 같은 로켓 등을 만들어 세계인을 감탄하게 만든



민족의 지혜가 농업분야에도 펼쳐졌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계최초의 온실을 우리들의 조상이 건설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전문가들은



철저한 고증 을 거친 후 정부의 후원 하에 2002년 2월 22일



경기도 남양주시 서울종합촬영소에 세계최초의 과학영농 온실을 복원 하는데 성공했다.



복원된 온실은 실내 넓이가 약8평이며 정남향의 가장 낮은 쪽이 50센티미터, 정북향의 가장 높은 쪽이 3미터인 경사형 지붕으로 햇볕이 최대한 들어올 수 있다.



지붕은 기름을 칠한 한지를 바른 창호로 덮여 있지만



햇볕 투과율이 45%를 넘으므로 일조량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한지로 만든 신발은 물 속에서도 다닐 만큼 튼튼하므로 창호가 빗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눈오는 날이나 밤의 보온을 위해 짚으로 만든 차양막이 창호를 보호하도록 설치됐다.



60여 톤의 황토 흙으로 만들어진 온실 벽은 40센티미터 두께이며,



내벽에는 역시 기름을 바른 한지로 도배해 햇볕이 실내에 골고루 반사되게 만들었다.


                   온실바닥에 온돌깔고 불 때어 보온


또 온실 바닥은 온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45센티미터 두께의 흙을 쌓았다.



온실 외벽에 설치한 2개의 아궁이로 불을 때어 온돌을 덮이며



아궁이 위에 놓인 솥에 물을 계속 부어 솥과 연결된 둥근 통을 통해 수증기가 안으로 들어가



실내온도가 15도 이상 유지 되도록 했다.



복원된 온실의 또 다른 특징은 현재 사용되는 철물을 비롯한 건축자재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고대에 사용된 건축 방식대로 시공했다 는 점이다.




.



온실내로 공급되는 수증기




온실이 완성된 후 2002년 3월, 온실의 온도와 습도를 조사했다.



온실 부위별 온도의 변화를 측정한 결과,



온돌 위 베드의 온도는 섭씨 20도 이상이 유지되는 지속적 보온 효과를 보였고



실내 온도도 섭씨 10도 이상으로 유지되었다.



이는 실외의 기온보다 평균 10도 이상 높은 온도 이다.



특히 온실 밖의 외기온도와 온실 내 지중온도의 편차가 야간에는 25도 이상 이나 되어



온실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산가요록’에 기록된 온실이 세계 최초의 과학영농 온실로 부각될 수 있는 이유는



온실이 갖추어야 할 3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의 특징적 난방 방법인 온돌을 사용해 겨울철 난방을 도모했고,



둘째는 한지에 기름을 발라 채광(햇빛 받음) 을 통해 실내온도를 높이고



습도 조절 을 가능하게 했다.




창호지는 3대 특성인 통기(공기 통함)성, 습도조절, 채광성을 갖고 있어 ‘살아있는 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호지만으로 습도를 조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가마솥을 걸고 물을 끓여 수증기를 실내로 유입해



온도와 습도를 동시에 올려주는 복합적인 온실 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등 다수.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면 쓸데없는 고민으로 자신을 낭비하게 되는 법]
  








“ 팔만대장경은 발해대장경 계승한 것 ”



‘북방 문화’는 중원이 아닌 고려로 계승됐다.











발해대장경은 거란대장경의 근본


북방불교문화 발해→ 거란 →고려 로 이어져




최근 발견된 8~9세기의 ‘발해(渤海) 대장경’〈본지 8월 7일자 A2면〉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 대장경’의 모본(母本 - 근본)이었음이 확인됐다.


이로써 거란이 발해 것을 그대로 옮긴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거란 대장경을 상당 부분 참고한 13세기의 고려 대장경(팔만대장경)이


사실은 ‘발해 대장경’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아져


발해와 고려의 문화적 계승관계 를 밝히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지학자 조병순(趙炳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거란 대장경인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 (華嚴經)’의 함차(函次)번호가



발해 불경으로 여겨지는 ‘대방광불 화엄경’ 권 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과 동일한 것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함차번호란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매긴 번호로, 이 순서가 동일하다는 것은 곧 같은 계통의 불경 임을 의미한다.



화엄경의 31~40권에 해당하는 현존 ‘대화령국장’의 함차번호는 ‘육(育)’이다.



그 앞에 존재했을 21~30장은 앞 글자인 ‘애(愛)’가 되지만



송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중국 불경은 이 부분이 ‘장(章)’으로 돼 있는 반면,



거란 대장경은 똑같은 ‘애’자였다.


고려 팔만대장경(1251년 완성)을 만든 결정적 공로자인 승려 수기(守其)는



1087년 완성된 고려의 ‘초조 대장경’과 북송(北宋)의 대장경, ‘거란 대장경’을 모두 비교·교감(校勘) 했다는 내용이



‘고려국 신조대장(新雕大藏)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돼 있다.



많은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내용을 근거로 “거란 대장경은 중원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대장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1991년 중국 산시성(山西省) 잉셴안(應縣)에서 거란본의 일부가 발견된 뒤에도 그와 같은 대장경이 없어 ‘북방 불교문화’의 실체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는



“ 고려 대장경이 참고한 거란본은 거란에 앞선 세력(발해)이 만들었을 것 ”이라고 추정했지만 아직까지 그 근거는 없었다.






‘동일한 함차번호’라는 것은 거란본이 발해본을 사실상 그대로 베꼈다 는 얘기가 된다.



조 관장은 “거란이 발해의 궁중 서고(책 창고)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는 기록이 있다”며



“여기서 고구려-발해-거란으로 이어지는 고대 북방 문화의 계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려 팔만대장경은 이 ‘북방 문화계통’과 당-송으로 이어지는 ‘남방(중원) 문화계통’을 모두 계승·종합한 ‘완정본’ 이라는 의미이며,



‘북방 문화’는 중원이 아닌 고려로 계승됐다 는 것이다.


조 관장은 또 “ 당시 대장경은 황제의 칙령(명령)이 없이는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대장경을 발간한 세력은 중원의 통치범위 바깥에 있었던 것이 된다 ”며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불경 전문가인 박상국(朴相國)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불경사(史)를 다시 써야 할 큰 발견”이라며



“그동안 잃어버렸던 북방 문화의 실체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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