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 유래 --- 필자 김앙섭

조회 수 12046 추천 수 150 2005.01.06 15:09:43

● 의성김씨의 유래 ● ---- 김 앙 섭 / 전 종친회 홍보교육간사

선조에 대한 관심에 대해 모든 개개인이 갖는 정신자세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자칫 평범한 사실을 평상시에 망각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예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나'라는 사실 확인이다. 생존경쟁 속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려는 피나는 노력은 하면서도 정작 '왜 살아야 하느냐' 하는 자신의 존재가치는 잊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지구촌에 어떻게 생존하게 됐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누구나 다 '부모님이 낳아 주셨으니까' 할 정도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다. 물론 부모님이 낳았으니까 이 세상에 나와 활동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전세계 50억 인구가 모두 부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은 50억분의 1에 해당하는 분자로만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같은 형태가 바로 이기주의를 낳았고, 윤리도덕은 한낱 공염불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부모를 흉기로 난자해 불을 질러 살해한 동물도 할 수 없는 패륜의 사건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도 있었다. 이는 바로 '나'의 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본다.
항상 이 세상에 태어나 생존하고 있는 가치를 '나'에게서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고 본다. '나 - 나'는 누구인가? 바로 부모에게서 육신을 받아 현세대에 태어나 '좋건 나쁘건' 살고 있는 것이다. 부모 없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로 나를 낳아주신 부모 또한 어떻겠습니까? 역시 부모에게서 물려 받았다. 이렇게 해서 부(父)․조(祖)․증조․고조 등 까마득한 선조에까지 역사는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런 말을 쉽게 듣게 된다.
'우리 증조 할아버지는 내가 보지도 못했는데.'
즉, 별로 관심이 안 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유복자나 이성을 갖지 못했을 때 조실부모한 아버지나 부모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으니 부모로의 관심이 없다는 뜻과 같지 않겠는가.
선조가 있었기에 바로 부모도 존재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됐다는 사실의 평범한 상식을 깊이 생각해본다면 이같은 사고는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리라 본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를 깊숙이 생각해 본다면 선조에 대한 애착과 숭모사상이 더욱 투철해지리라 본다. 그래서 그같은 생각에서 오늘 선조에 대한 유래를 더듬어 볼까 한다.
선조에 대해서는 원조, 즉 왕족의 계보인 선원계와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친계로 나눠 설명을 하겠다. 우리의 원조는 신라의 왕족이었다.

선원계보는 원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에서부터 신라 마지막 제56대왕인 경순왕(敬順王) 휘 부(傅)에 이르기까지와 의성김씨 친계는 시조 의성군 석(義城君 錫)에서 13세까지를 중심으로 요약해 설명을 하겠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설화나 연대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는 서기 60년 8월 4일, ≪삼국사기≫는 65년 3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대동소이하기에 ≪삼국사기≫를 인용하기로 하겠다.

'신라 탈해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숲속에서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 살펴보니 작은 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고 하얀 닭이 울고 있었다.
이 궤에서 용모가 준수하게 빼어난 사내아이가 들어 있어 왕은 크게 기뻐하며 거두어 길렀는데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 해서 성을 김(金)씨라 했다. 금궤가 발견된 숲에서 닭이 울었다 해서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다른 성씨의 시조에 대한 탄강(誕降)설화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뿌리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신라의 첫 지도자(이사금, 왕)인 박혁거세의 탄강설화이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 6부 촌장들이 모여서 군주를 세울 의논을 하고 있는데 양산 밑 나정에 이상스런 번갯불이 땅에 비치면서 하얀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보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붉은 알이 있었는데 쪼개보니 아름다운 동자가 나타났다.'

다음은 신라 제4대왕 석탈해의 탄강설화이다.

'노파가 아진포 냇가에 나갔더니 까치가 모여들어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가보니 배가 있는데 그 안의 궤를 까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궤는 길이가 20척으로 노파가 끌어내 하늘을 향해 기원하고 열어보니 사내아이와 보물이 가득 있었다.'

고 전하고 있다. 그밖에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구지봉 여섯 개 알의 설화, 제주 탐라의 삼성혈 설화 등 많다.
이같은 장황한 전설을 왜 설명하느냐가 문제이다. 사기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썼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인간은 태초에 진화가 됐건 창조가 됐건 몇 만여 년 전에서부터 지구촌에 생존해 있었다.
박혁거세가 나타났던 시기에도 6부 촌장이 화백회의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왕족의 시조만은 하늘이나 땅에서 나온 것처럼 설화를 만든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고대의 사기는 물론, 당시의 생활상을 면밀히 살펴보고 여기서 얻어진 것이 당시 서라벌, 즉 신라는 농경민족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문화가 뒤떨어져 있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런 관계로 말이 하늘로 날아갔다는 박혁거세는 북방 기마민족으로 이주해 와서 이곳을 통치했다고 보는 것이 명확해졌다.
역시 배를 타고 온 석탈해도 바다를 건너와 기마민족인 박혁거세가를 문명으로 누르고 제휴하면서 통치권을 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보공 김알지는 어떤 민족인가 하는 것이다. 대뜸 대보공은 토착민족임을 알 수가 있다. 흰닭이 울었다는 점이다. 바로 닭은 신라 때 '토템'의 우상으로 숭배하는 가축이었다. 이같은 풍습은 아직도 우리 가정에 많이 남아 있다.
'밤중 시림에서 닭이 울어……'
하는 것은 석탈해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박혁거세를 견제하며 토착족의 지도자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김씨의 원조는 토착족으로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체의 세력을 팽창시켜 주권을 잡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선원계보 설명이다.
김알지는 열한을 낳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고, 수류는 욱보를 낳고, 욱보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으니--- 이런 계보로 바로 대보공의 6대손 미추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당시의 지도자 명칭은 이사금․마립간 등으로 써오다 왕이라 했지만 통칭 왕으로 설명을 하겠다. 그러나 미추왕은 우리의 직계 선조가 아니다. 딸 둘에 아들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의 직계 선조로서 신라의 왕위에 오른 분은 미추왕의 조카이며, 말구의 아들이신 내물왕에서부터 시작됐다.
신라 천년의 사직, 기원전 57년에 시작해 서기 935년에 막을 내리기까지 56대 왕이 통치를 해왔다.

그중에 김씨 왕이 38왕이며,
우리의 직계 선조는 신라 17대 내물왕과 22대 지증왕, 38대 원성왕, 45대 신무왕, 46대 문성왕, 신라 마지막의 56대 경순왕으로 모두 여섯 분이다.

그러면 대보공의 자손으로 관향 또는 본관을 달리하는 성씨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성씨를 고찰하다 보니까 본관이 다른 김씨가 모두 152개 성이나 된다. 그중에 대보공 자손이 141개 성이고, 아예 성자까지 달리한 다섯개 성씨를 포함하면 146개 성이나 된다. 나머지 김씨는 가락김씨와 가야계 및 귀화 성씨였다.

내물왕계의 안성김씨, 무열왕 6세 주원계가 강릉김씨 등 3개성, 신무왕계가 7개성, 문성왕계가 3개성, 경문왕계가 3개성이고, 경순왕계는 무려 126개성이나 된다. 이중 안동김씨, 안동권씨, 영양김씨는 원조의 계파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이렇듯 146개성 중에 본관 아닌 성 자체를 달리하는 성씨는 주원계 강릉왕씨, 경문왕계 광주이씨․철원궁씨, 경순왕계 수성최씨․감천문씨 등이며, 곡출연씨도 대보공계라 하나 명확치가 않다.
이들 모든 성씨를 신라김씨라 한다. 물론 왕․이․궁․최․문씨도 포함된다. 고려 왕건의 후손인 개성왕씨는 포함되지 않으니 혼돈하지 말기 바란다.

이상으로 선원계보를 간단하나마 설명했다.
다음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즉 우리의 성씨를 살펴보자.
의성김씨의 시조는 의성군에 봉해지신 석(錫)임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다.
석(錫) 시조는 경순왕의 넷째 아드님이시다.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당초 박씨인 죽방부인(竹房夫人)과 결혼해 태자 일(鎰)과 차남 굉( ) 등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경순왕이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전쟁을 계속한다면 백성들만 회생시키게 된다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신라를 고려의 왕건 태조에게 넘겨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에 태자 일과 둘째 아들 굉이 크게 반발을 했다.
그래서 태자 일은 마의를 입고 개골산, 즉 금강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춰 후세에 마의태자란 이름을 남겼고, 둘째 굉은 해인사에 들어가 범공 스님이 되었다.
마의태자 일의 후손은 부안․부령김씨이고, 범공(梵空)스님 굉의 후손은 교하․나주․안로․해주김씨가 됐다.
아무튼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 태조(왕건)에게 양국(讓國)했고, 왕건은 정략적으로 자신의 맏딸인 신란공주를 경순왕에게 결혼을 시켰다.
여기서 경순왕과 신란공주 사이에 태어나신 아드님의 순서에 대해 경순왕계 각 성씨의 기록이 달라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자리에서 대표적으로 의성김씨의 세보(世譜)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주김씨 족보를 비교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우리 의성김씨의 기록이다.
경순왕과 신란공주 사이에서 은열(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명종(鳴鍾)으로 여섯 아들을 뒀다고 했다.

이 순서로 보면 태자 일, 차남 굉, 3남 은열, 4남 석, 5남 건, 6남 선, 7남 추, 8남 명종의 순서로 우리 의성김씨의 시조이신 '석'께서는 4남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경주김씨의 족보에 기록돼 있는 것은 다르다.
즉 셋째 아들이 명종이요, 넷째 아들은 은열이며, 우리 '석' 시조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바로 우리의 족보에는 여덟째 아들 명종은 경주김씨 족보에는 셋째아들이 됐고, 우리 족보의 셋째 아들 은열은 경주김씨 족보에 넷째로, 우리 족보의 넷째 아드님이신 '석' 시조는 경주김씨 족보에 다섯째로 밀려난 것이다.
경주김씨 족보는 명종이 영분(永芬)의 시호를 받고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으며, 영분공파를 이뤘고, 은열은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져 대안군파를 이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드님들의 순서를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 다만 족보의 기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우리 의성김씨는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세보의 기록대로 '석' 시조를 경순왕의 넷째 아드님으로 적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른 성씨에서 '석' 시조를 다섯째 아드님이라 하더라도 혼돈없이 답변을 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해 여기에 설명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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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사항≫ 의성김씨 시조는 경순왕의 넷째아들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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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의성김씨의 선조에 대한 내력으로 들어가 보겠다.
경순왕의 넷째 아드님이신, '석' 시조는 신라의 왕자로 고려 태조의 외손자이며, 의성군에 봉해지셨다.
그래서 의성을 식읍으로 군(君)에 봉해 지셨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관향을 의성이라 하여 의성김씨가 됐으며, 신라의 왕족으로 고려 왕실의 외손으로 면면히 피를 이어왔던 것이다.
'석' 시조의 후손으로 이밖에 개성․경산․고령․설성김씨 등이 있다.
선조들은 고려와 조선조를 거치면서 문무를 겸비한 민족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셨지만, 계보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의성군 '석' 시조께서는 내사령 평장사를 지내신 '일(逸)' 한 분의 아드님을 두셨다.
'일'께서는 홍술(弘術)․인술(仁術) 두 아드님을 두셨고, 홍술께서는 국(國)을 두셨으며, 국은 경진(景珍)․경염(景琰) 두 아드님을 두셨다.
여기서 3世인 인술 계대와 5世인 경염의 계대는 혼돈을 피하기 위해 뒤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맏집을 중심으로 먼저 설명하겠다.

경진께서는 아드님 언미(彦美)를 두셨고, 언미는 아드님 습광(襲光)을 두셨으며, 습광께서는 아드님 공우(公瑀)를 두셨다.
상서복야의 벼슬을 지내신 공우 선조께서 아들 3형제를 두시면서 의성김씨가 번성하는 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공우 선조의 장남은 태자첨사(太子詹事)의 벼슬을 역임하시고 의성군에 봉해 지신 용비(龍庇), 차남은 수사공(守司空)의 벼슬로 역시 의성군에 봉해 지신 용필(龍弼), 삼남은 개성부사와 평장사를 지내시고 개성군에 봉해 지신 용주(龍珠) 선조이다.
여기서 셋째 아드님이신 용주의 후손들은 개성김씨로 관향을 달리했고, 일부 후손은 의성김씨에 동보(同譜)하고 있음을 알아두어야겠다.

첨사공 용비, 수사공 용필, 개성군 용주, 이 3형제분은 시조 의성군 석의 8대손으로 世수로는 9세가 된다.
알기 쉽게 대수는 본인을 제외한 것으로 세수에서 한 숫자를 빼면되고, 세수는 본인을 포함시킨 숫자로서 대수에서 한 숫자를 더해 주면 된다. 앞으로 세수를 기준으로 설명을 하니 착오가 없기 바란다.

앞에서 말했듯이 9세를 정점으로 우리 의성김씨는 각 파가 무수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깝고 먼 척도를 그 촌수에다 기준하고 있다. 이는 형제와 10촌, 20촌이 같다고는 할 수가 없겠다.
그러나 친족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한 할아버지 자손이다. 옛말에 '백 代도 지친'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시조로부터 제일 낮은 항열을 37세로 치더라도 '일(逸)'께서 독신이시니까 제일 먼 촌수가 70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멀고 가까움은 촌수보다 서로 가깝게 교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말은 바로 이어서 우리 의성김씨의 전국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서 강조해 두는 것이다.
1997년에 간행한 의성김씨의 대동보는 주로 20世를 기준으로 정리가 돼 있다. 이에 따라 20世를 기준으로 파를 따진다면 무려 288개 파에 이르러 며칠을 설명해도 부족할 정도다.
그래서 주로 13世를 전후해 그 파와 후손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고장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전국에 분포된 의성김씨의 집성촌은 대충 150여개 마을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첨사공 용비의 아드님은 장남 복야공 의(宜), 차남 부원군공 굉(紘), 삼남 찬성사공 영(英), 4남 전서공 세인(世 ) 선조이다.
그중 '의' 선조의 장남이며 시조의 11세인 상서공(尙書公) 인지(麟芝) 선조의 후손으로 상서공파(尙書公派)는 경북 의성 문흥, 영일 덕동, 영천 신령, 군성, 충북 등에 거주하고 있다. 상서공의 셋째 아들 인수(仁守) 선조의 증손자 화은공 진(晋)은 시조의 15世로 화은공파(華隱公派)라 한다.

다음은 '의' 선조의 둘째아들 소윤공 서지(瑞芝) 선조의 맏아들이며, 시조의 12세인(이하 세는 시조로부터의 세수이므로 세로만 설명한다.) 예빈경 인회(仁晦) 선조의 후손인 예빈경공파(禮賓卿公派)는 영천 신호, 영일 덕동, 의성에 거주하고 있다.
'의' 선조의 손자이며, 소윤공 서지의 둘째아들 좌사윤공(左司尹公) 태권(台權) 선조의 맏아들, 즉 소윤공의 손자인 전서공 거두(居斗) 선조의 후손들은 전서공파(典書公派)로 안동 일원에 의성․군위․청송․예천․영천에 분포돼 있다. 안동에 앞의 5파가 바로 전서공파에 속한다.
좌사윤공 태권의 둘째 아드님이며, 전서공의 동생인 퇴암공 거익(居翼) 선조는 퇴암공파(退庵公派) 또는 문학공파(文學公派)로 충남 부여, 경남 김해․창원, 전북 정읍․고창․고부․부안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 '의' 선조의 셋째 아드님이며, 11世인 평장사공 춘(椿)의 후손은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로 공의 장남 사의공 옥(玉) 후손은 경북 예안․영주․봉화, 차남 밀직사사공 윤(王侖) 후손은 영천․하동, 삼남 중랑장공 혁(革)의 후손은 이북의 함북 북청, 사남 시중공 연(衍)의 후손은 예안 한곡에 거주하고 있다.
여기서 '의' 선조의 넷째 아들인 기지(麒芝) 선조가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져 고령김씨로 갈라져 나갔다는 것을 첨가한다.
첨사공 용비 선조로 다시 올라가 첨사공의 둘째 아들이며, 10世인 부원군공 굉(紘)의 아드님 양소공 영열(英烈)선조의 후손은 양소공파(良昭公派) 또는 맹암공파(孟巖公派)로써 공의 장남 상호군공 흥복(興復) 후손은 경북 선산, 충남 공주, 충북 충주․음성, 황해 송화 장연, 평북의 태천, 둘째 부호군공 신복(申復) 후손은 곡성, 자성, 황해도 봉산, 셋째 유수공 경복(慶復) 후손은 전남 장성․해남․영광, 광주 맹동, 충주, 경북 예천, 전북 고창 등지에 살고 있다.

또 첨사공 용비 선조의 셋째 아드님 찬성사공 영(英)의 장손자이며, 12世인 남파공 광부(光富) 후손은 남파공파(南坡公派)로 경북 선산, 경기 강화․파주, 경북 청송, 충북 괴산, 경남 합천․청도, 충남 목천, 둘째 손자 판사공 수덕(修德) 선조의 차남이며, 13세인 참의공 용기(用起) 선조는 참의공파(參議公派)로 고령 월산, 3남 문절공 용초(用超) 선조는 문절공파(文節公派)로 성주 윤동, 내기, 상주, 영천, 금릉, 성주 사월, 밀양, 봉화 해저, 진양 압현, 산청, 현풍, 고령 등에 집성촌을 이루며 번창했다.

한편 찬성사 '영' 선조의 둘째 아들인 지평공 자돈(自敦) 선조는 지평공파(持平公派)를 이루며 전북 정읍․전주, 경상도의 경산․청도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첨사공 용비 선조의 넷째 아들이며, 10世인 전서공 세인(世 ) 선조의 후손은 전서공파(典書公派)로 경기 안성, 전북 정읍, 경북 풍기에 살고 있다.

다음은 첨사공의 동생인 수사공 용필(龍弼) 선조의 계열을 알아보겠다.
수사공파의 후손은 19世에 이르러 조선조에 유명한 명신이며, 석학이신 모재 안국(安國), 사재 정국(正國) 형제를 주축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모사재파(慕思齋派)라 부르며, 안국의 시호가 문경(文敬)으로 문경공파, 정국의 시호는 문목(文穆)으로 문목공파로 됐다. 후손들은 충남 서산, 경기 여주․광주․평택, 서울 신림동과 이북의 평남 용강 지방에 살고 있다.

다시 첨사공의 셋째 동생인 개성군 용주 선조는 전에도 말했지만 후손은 개성김씨를 쓰고 있고, 15세 남보(南寶) 후손만이 의성김씨를 쓰고 있다. 개성군(開城君)의 7세인 남보(南寶)는 문민(文敏)의 시호를 받아 문민공파로 충북 옥천에 집성해 가세를 누리고 있다.
이렇게 해서 복야공 공우(公瑀) 선조의 맏집 거주 분포를 대충 살펴보았다.
이어서 전에 말했듯이 시조 의성군 '석' 할아버지의 둘째손자 인술 선조가 있지 않았는가. 인술 선조의 후손은 14世에 이르러 두 파로 갈라졌다. 첫째는 군수공 문상(文祥) 선조로 군수공파를 이뤄 합천 황계에, 둘째는 교리공 피(彼)자로 교리공파를 형성하여 김해에서 화합을 이루고 있다.

끝으로 뒤로 미뤘던 '석' 시조의 현손이며, '국'의 차남이신 경염의 후손이다. 공의 5대손(6세)이며 11世인 찬성사공 성단(成丹) 선조께서 찬성사공파(贊成事公派)를 이루고 의성 사미․분토․장림․원지에 집성촌을 형성해 있다.

우리 의성김씨는 남한에 분포된 인구로 1985년 국세조사에서 21만여 명, 현재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동안 농촌의 이농현상과 각종 건설공사로 흩어지고 없어져 많은 변화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자료는 문경공(김안국) 넷째 후손이 펴낸 책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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