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김씨 돋보기 2 ===씨족의 개요

조회 수 10673 추천 수 125 2005.01.07 10:10:08


◆ 씨족사의 개요

의성김씨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로 의성군에 봉해진 '석'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석> 이후로 의성(義城)을 본관으로 하였다.

'의성김씨족보'에는 '석'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김씨천년사'를 비롯한 경순왕 후손에 대한 기록에는 경주김씨의 분관조가 명종이 셋째 아들, 은열이 넷째 아들로 되어 있으므로 석이 다섯째 아들로 된다.
이러한 족보의 기록은 당대의 기록이 아니고 김석문(金石文)에서 확인되지도 않으므로 어느 것이 바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의성김씨의 인물로 고려․조선조에 걸쳐 군(郡)에 책봉된 이는
시조 의성군 석을 비롯 홍술․용비․용필․굉․영열․광부 등 7명이고,
시호를 받은 사람은 충의 용주(忠毅 龍珠), 양소 영열(良昭 英烈), 문원 원(文元 源), 문민 남보(文敏 南寶), 문절 용초(文節 用超), 문경 안국(文敬 安國), 문목 정국(文穆 正國), 충강 제민(忠剛 齊閔), 문충 성일(文忠 誠一), 문정 우옹(文貞 宇 ), 문절 응택(文節 應澤), 정민 지수(貞閔 地粹), 문민 덕선(文敏 德善) 등 13명이다.

그 후대에 역사에 이름 있는 인물은 석학․문장가였던 안국을 비롯하여 정국․성일․우옹․제민이 있고, 구한말 망국 이후는 도화․하락 등 의병장과 동삼․창숙 같은 지사(志士)들을 낳았다.

의성김씨에서는 조선조에 96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었는데, 이는 경주김씨․광산김씨․연안김씨․김해김씨․청풍김씨 다음으로 많은 수다.

의성김씨의 분파는 9세조를 분파조(分派祖)로 하여 5개파로 나누어진다.
용비의 후손이 첨사공파, 용필의 후손이 수사공공파, 용주의 후손이 충의공파, 성단의 후손이 찬성공파, 흥의 후손이 선락장군공파로 나누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성현 인물조에 실린 고려초의 인물로 홍술이 있다.
그는 신라말 진보성 장군으로 있다가 고려 태조에 귀의하고 승격된 의성부의 성주가 된 인물이다.
그런데 석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의성김씨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외에 원종조에 과거에 올라 충선왕 때 찬성사(贊成事)에 오른 환( )과 그의 아들 개물이 있으나 '임술보(壬戌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태자첨사를 지낸 용비의 증손 태권은 좌사윤을 지냈다.
그의 아들 거두는 공조전서를 지냈고,《삼국유사》중간본의 발문을 쓸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거익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조선개국 후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했다.

김광부는 용비의 셋째 아들 영의 손자로 우왕 5년 영남순문사겸 합포도원사로서 침입한 왜구와 싸우다가 가수현 서정에서 전사, 병조판서․순성보리공신으로 추증되었다.

찬성공파의 파조가 되는 성단은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김용초는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무예에도 뛰어났다.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정도전 등 15명과 함께 공훈에 따라 벼슬을 받았다.
조선개국 후 호남병마도절제사를 제수받고 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영열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박포의 난 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의성김씨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며 조선 인종묘정에 배향된 모재 안국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연산군 7년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2년 뒤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사림(士林)의 대표적인 인물로 전라도관찰사로 있다가 기묘사화 때 대사헌 조광조의 일파라는 이유로 파직되기도 했다.
관직은 대사헌․대사간․예조판서․병조판서, 양관대제학․좌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했다.

김안국은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병법․국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동몽선습〉〈모재집〉〈모재가훈〉등의 저서와〈이륜행실〉〈창진방(瘡疹方)〉등의 편저서를 남겼다.
조광조와 같이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의 문하에서 김인후․유희춘 등이 배출되었다.

그의 동생 정국 역시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중종 4년에 문과에 급제, 호당(湖堂)에 뽑혔고, 황해도․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병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기묘사화 때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다가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지냈다.
저서에는〈성리대전절요〉〈역대수수승통지도〉〈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기묘당적〉〈사재집〉등이 있다.

김희참은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翰林)․검상(檢詳)․사인(舍人)을 거쳐 삼척부사를 지냈는데, 아들 넷중 우홍․우굉․우옹 3 형제가 문과에 올라 4 父子가 대과에 오른 유일한 의성김씨의 집안이 되었다.

김거익의 7세손 제민은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의병대장으로 출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 네 아들 중 안(晏)은 전쟁터에서 숨졌고, 화․흔․섬 3 형제는 아버지를 도와 군량미를 조달, 바닷길을 통해 행재소까지 보내기도 했다.

김우옹은 이황․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명종 22년 문과에 급제, 대사성을 거쳐 안동부사를 지냈다.
정여립의 옥사 때 그와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속강목(續綱目)〉20권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풀려나 부호군(副護軍)으로〈비어기무(備禦機務)〉7條를 건의했고, 그 후 이조참판․예조참판․병조참판, 한성좌윤을 역임했다.

김용(涌)은 선조때 과거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했다.
임진왜란때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항쟁, 이듬해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이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1598년 유성룡이 삭직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산관․선산부사 등 외직(外職)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광해군때 태상사정으로 편수관이 되어〈선조실록〉수찬(修撰)에 참여했다.

김지수는 광해군때 폐모론에 반대해 부령으로 귀양갔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병조의 낭관(郞官)을 지냈다.
〈조천록(朝天錄)〉은 인조 4년 김상헌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면서 지은 시들을 묶은 것이다.

김성구는 부제학 우굉의 후손으로 지평․정언․대사성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는데, 후손에서 문과급제자가 19명이 나왔다.

김방걸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때 복제(服制) 문제를 거론한〈기사소(己巳疏)〉를 올려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승지․대사성․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서인(西人)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을 탄핵했던 죄로 전라도 동북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성탁의 아들 낙행은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귀양가게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귀양지로 따라가 10여년간 모신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효자로 이름이 났었다.

김굉은 이상정의 문인으로 정조 1년 문과에 급제, 전적․지평․단양군수,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명필․명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단양군수때 이속(吏屬)들의 시폐(時弊)를 논한 만언소(萬言疏)가 명문으로 꼽히고 중요한 외교문서를 많이 썼다.

김한동은 관찰사 성구의 증손으로 정조때 문과에 급제, 관찰사․승지․대사헌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에는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되기도 했었다.

의성김씨의 후손에서 구한말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열사․의사로는 다음의 인물을 들 수 있다.

김도화는 을미사변 직후 곽종석․김흥락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제천의 유인석․서상열 등과 연합전선을 펴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학문에서 뛰어났는데 한일합방 후 일본 총독부에서 사문(斯文)진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우대, 식민통치에 이용하려 했으나 그는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이때 그를 찾아왔던 고교형은 집 대문에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는 글씨를 써붙이고 돌아갔다고 한다.

김하락도 을미사변때 창의하여 운현․노루목․이현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남한산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뒤에 영덕 오십천 전투에서 순국했다.
그의〈정토일기(征討日記)〉는 당시 의병활동의 기록이다.

김동삼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이시영․이동녕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고, 이준․여준 등과는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정 노동국총관이 되기도 하고, 또 여러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여 총장이 되었다.
1925년 정의부를 조직하여 행정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김창숙은 유림(儒林)으로 일제시대 반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애국자요 학자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매국오적청참소(賣國五賊請斬疏)를 올렸고, 1908년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비난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전국 유림대표 137명의 명의로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이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기 위해 상해로 갔었으며, 그곳에서 임정에 참여하여 의정원 위원이 되었다.
다음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지〈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사민일보〉를 발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손문과 교섭하여 독립운동 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부의장에 당선되었다가 1927년 상해주재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한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모진 고문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어 버렸다.
8․15광복 후 유도회(儒道會)를 설립해서 초대회장을 지냈고, 초대 성균관 관장과 성균관대 학장을 지냈다. 6․25사변때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을 보냈다가 40일간 옥고를 치렀고 이시영․김성수․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해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 인구 및 가구 통계표(2000년 통계자료) --- 의성김씨 홈페이지에서 인용

서울특별시---가구수 14,297 / 인구수 45,391 / 남자 23,477 / 여자 21,914
부산광역시---가구수  5,934 / 인구수 19,428 / 남자   9,967 / 여자   9,461
대구광역시---가구수 13,352 / 인구수 43,420 / 남자 22,466 / 여자 20,952
인천광역시---가구수  3,226 / 인구수 10,676 / 남자   5,565 / 여자   5,111
광주광역시---가구수    766 / 인구수   2,607 / 남자   1,295 / 여자   1,312
대전광역시---가구수 1,856 / 인구수   6,228 / 남자   3,165 / 여자   3,063
울산광역시---가구수 1,954 / 인구수   6,460 / 남자   3,459 / 여자   3,001

경기도------가구수 11,192 / 인구수 37,574 / 남자 19,243 / 여자 18,331
강원도------가구수  1,865 / 인구수  5,637 / 남자  2,891 / 여자  2,746
충청북도----가구수  2,655 / 인구수  8,189 / 남자  4,235 / 여자  3,954
충청남도----가구수  2,042 / 인구수  6,441 / 남자  3,327 / 여자  3,114
전라북도----가구수  2,125 / 인구수  6,579 / 남자  3,358 / 여자  3,221
전라남도----가구수    604 / 인구수  1,986 / 남자     987 / 여자     999
경상북도----가구수 13,698 / 인구수 40,345 / 남자 20,681 / 여자 19,664
경상남도----가구수  3,654 / 인구수 11,837 / 남자   5,981 / 여자  5,856
제주도------가구수    157 / 인구수     511 / 남자     258 / 여자     253

총계-------가구수 79,368 / 인구수 253,309 / 남자 130,357 / 여자 12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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