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56대 경순왕

조회 수 8701 추천 수 177 2005.01.08 08:18:38





● 신라 56대 경순왕 ●


* 누구나 역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으리나 믿고 있으나 홈페이를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올립니다,


대왕께서는 서기 897년에 신라의 서울 월성(지금의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휘(諱)를 부(傅)라 한다.
아버님은 이찬 효종(伊飡 孝宗)이고(후에 신흥대왕으로 추존), 어머님은 계아부인(桂娥夫人) 김씨이며(후에 계아태후로 추존), 신라 제46대 문성대왕의 6세손이다.

서기 927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왕도(王都)에 침입하여 경애왕(朴氏 諱 魏膺)을 살해하자, 대왕께서 신라 제56대 왕위에 오르시니 이때 31세이다.

당시의 신라 국정을 살펴보면, 제51대 진성여대왕 때부터 여러 곳에 도적이 일어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게 되었으므로, 진성여대왕께서는 그 조카인 효공대왕에게 양위하였다.
그러나 효공대왕 시대에는 북쪽의 궁예와 남쪽의 견훤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왕권은 날로 쇠약해졌으며, 대왕께서는 아드님이 없이 돌아가셨으므로, 백성들이 효공대왕의 매부이자 신라 제8대 대왕 아달라 이사금의 먼 후손인 박씨(휘 景輝)를 세워 왕으로 모시니, 이분이 곧 신라 제53대 신덕왕(新德王)이다.

신덕으로 비롯된 박씨 왕은 경명왕․경애왕까지 3대로 그치고, 그 뒤를 이어 경순대왕께서 보위에 오르시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외우내환이 겹치고 국사다난한 시기에 왕위에 오르신 대왕께서는, 국력배양과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시었으나, 이미 기울어진 천하대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대왕 5년(서기 931년) 2월에 고려 태조 왕건의 예방을 받고, 양국의 우호를 다진 바 있으나, 견훤의 무도하고 횡포함은 날로 더하고,
서기 934년에 운주(지금의 충남 홍성) 일대의 30여 군․현이 고려에 복종하는 등 국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해마다 국력이 쇠약해짐으로써,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대왕께서는 만약에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날로 강성해지는 고려에 항거한다면, 그 화가 백성들에게 미칠 것을 근심하시어, 고려 태조에게 양국(讓國)할 것을 군신과 더불어 논의하였다.

마의태자가 이를 반대하였으나, 대왕께서는 뜻을 굽히지 않으시고 서기 935년 12월에 드디어 나라를 고려에 손국(遜國)하시니, 이로써 신라 왕조는 992년의 사직에 종언을 하게 되었다.

경순대왕께서 천년 사직을 고려에 손국하신 것을, 무심한 일부 사학자나 세인들은 흔히 항복이라고 표현하나, 그것은 결코 항복이 아니고, 반드시 손국 또는 양국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군왕의 권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민생을 생각하고, 국가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처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간과 머리가 땅바닥에 으깨지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고 하시며, 무모한 항전을 포기하고 제세구민(濟世救民)을 위하여 스스로 왕좌를 물러나신 대왕의 높은 뜻을 우리는 올바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경순대왕조의 기록을 빌어 말한다면, '경순대왕께서 고려 왕건에게 양국하신 일은 비록 마지못해서 한 일이지만, 옳게 하신 일이다.
그때, 만일 역전사수(力戰死守)하여 고려군에 항거하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가 궁하여지면, 반드시 그 종족이 패멸되고 화가 무고한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만약 그리되었다고 하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10대 고적도시, 또는 지하박물관 등으로 불리우는 경주 일대의 유적과, 국보․보물 또는 고적․사적 등 각종 문화유산을 남긴 찬란한 신라문화가 어찌 능히 보전되어 왔을 것이며, 신라김씨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경순대왕의 후손들과 그밖의 많은 신라 유민들의 후예가 어떻게 생을 부지하여 지금처럼 번창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일찍이 신라의 고도 월성(지금의 경주)의 이름없는 시민들이, 대왕의 인덕을 흠모하는 나머지 사당을 지어 대왕의 영정을 모셔놓고 제향을 받들어 온 것은, 곧 당시의 민심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대왕께서는 당초에 계림군 박광우(鷄林君 朴光佑)의 따님 죽방부인 박씨를 왕비로 맞으셔서, 두 아들인 태자 일․굉과 1녀를 낳으셨고,
다음으로 맞이하신 왕건 태조의 따님이신 낙랑공주와의 사이에서 은열․석․건․선․추․명종의 여섯 형제와 두 딸을 두셨으며, 후에 낙랑공주께서 금강산 돈도암으로 입산하자,
다시 순흥안씨(順興安氏)를 맞으셔서 아홉째 아들 덕지를 낳으셨다.

대왕께서 고려에 양국하시자 왕건은 정승공을 봉하여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서시게 하고 월성을 고쳐 경주라 하여, 이곳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으며, 경종 때에 다시 상부령으로 삼았다.

대왕께서는 만년에 불교에 뜻을 두고 명산대천을 찾아 주유천하하시다가, 제천에 이르러 이궁(離宮)을 짓고 그곳에 머무시면서 미륵불상을 모시는 학수사와 고자암을 세워, 신앙과 수도에 몰입하셨다.

서기 978년 음력 4월 4일에 승하하시니 향수 82세이셨으며, 묘호를 경순(敬順)이라 하니, 이는


    應天撫運之敬(응천무운지경)의 '敬'과
    應時率德之順(응시솔덕지순)의 '順'을

받아〈敬順〉으로 모신 것으로, 대왕께서 천운을 헤아리시고 시류를 살피셔서 만백성의 생명을 구하신 크나큰 인덕을 기리는 뜻이 담긴 것이라고 해석된다.


대왕께서 승하하신 후 이미 천여 년이 지났으나, 대왕의 인민지덕(仁民之德)을 흠모하는 민심은 아직도 한결같아, 후세인들은 대왕의 실국(失國)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곳곳에 묘전을 세워 봄․가을로 추앙의 향화를 받들고 있으며, 대왕의 후손들 또한 매우 번창하여 명문거족의 대성(大姓)들이 몇 백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대왕의 능침(陵寢)은 장단군 남팔리 즉,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낭포리 성거산 줄기의 화장룡계좌에 모셨다.

출처 : 모재 안국님의 네째후손이 펴낸 <문경>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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