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지역 무장 항일운동을 주도, 옥중에서 순국한 민족지도자


● 김 동 삼 ●


대한제국 말 애국계몽운동가로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던 김동삼(金東三)은 일제시대에는 만주에 망명하여 무장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는 것만이 국권회복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던 그는 항일 무장투쟁에 주력하다가 끝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받고 수감 중 옥사했다.


김동삼(金東三)의 본명은 긍식이며, 호는 일송, 본관은 의성으로 1878년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에서 출생하였다. 영남의 저명한 유학자 김흥락의 제자인 김주병에게서 한학을 익힌 그는 정통적 한학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가 애국계몽운동가로서 변신하게 된 것은 일찍이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웠던 유인식의 영향 때문이다. 위정척사론자로 의병투쟁에 나섰던 유인식은 1903년 서울에 올라와 신학문을 접하고 러·일전쟁을 목격함으로써 애국계몽운동가로 변신, 안동으로 귀향했다. 김동삼은 그의 감화를 받아 민족교육만이 구국의 길이라 판단하고 1907년 의성김씨 문중을 설득하여 협동학교라는 근대적 사립 민족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그는 인근의 지도자를 규합하여 청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첫해에 2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국외로 망명하여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1911년 문중의 일가 30여 명과 같이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신민회 지도자인 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상룡 등과 같이 경학사와 부민단을 조직하고 토지를 구입하여 재만 동포의 농지개척과 생활안정을 도모하며 독립운동 기지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해 독립군 양성에 뜻을 두고 신흥강습소(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고 1914년에는 백서농장을 경영하여 독립운동의 재원 조달의 근거를 마련, 수많은 청년들을 독립군 사관으로 양성하였다.

▲ 서로군정서 조직, 독립전쟁의 인적·물적 자원 제공
1919년 서일·여준·신팔균·김좌진 등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1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5월 고산자(孤山子)에서 이상룡과 같이 독립전쟁을 수행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였으며 독립전쟁에 인적·물적자원을 제공할 교민단체인 한족회를 설립하여 군정부의 참모부장, 한족회의 서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서로군정서 독립군은 만주와 국내에서 일본 군경과 치열한 독립전쟁을 수행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대규모의 일본군이 만주로 출병함으로써 독립군의 활동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김동삼은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무장독립단체를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대일항전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각 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흥경현에서 오동진 등과 함께 통합단체인 대한통군부(統軍府)를 조직하고 교육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후 문호를 개방하여 조직을 확대 강화하고자 같은해 8월 환인현(桓仁縣) 마단자(馬團子)에서 8개 단체 대표 81명을 소집하여 남만 한족통일회를 개최하였고 이로써 통군부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었다.
김동삼은 이 대한통의부의 최고책임자인 총장에 추대되어 항일 무장투쟁과 함께 재만 한인들의 생활안정과 권익옹호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통의부도 산하에 무장독립군인 의용군을 두었고 관할구역으로 16개 지방구와 3개 특별구를 두어 행정 사법기관을 설치, 재만 한인의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성화를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통의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회의는 국내외에 있는 모든 독립운동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6개월 동안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김동삼은 의장에 선출되었고, 부의장에는 안창호·윤해가 선임되었다.
이 회의 의장으로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그는 모든 독립운동단체의 일원화와 임시정부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는 각 단체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오히려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개편하자는 개조파로 분열되서 논쟁만 계속되었다. 이에 김동삼은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는 30여 개의 개조파 대표들과 성명을 발표한 다음 만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만주에도 대한통의부를 이탈하는 세력들이 등장하여 의군부(義軍府)와 참의부(參議府)가 조직되어 분열됨으로써 독립운동계는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김동삼은 1924년 길림에서 대한통의부를 중심으로 각 단체 대표들을 모아 전만주 통일회의준비회를 개최하여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재통합을 결의하고 8개 단체 대표 25명이 정의부를 조직하였다.
당시 만주에는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가 정립되었다. 이 삼부 중 참의부는 군사적 성격이 강한 단체였고, 정의부는 민사 사무에 치중하여 자치 정부적 성격이 강하였다. 김동삼은 정의부의 참모장과 행정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27년 국내에서 민족·사회 양진영이 합하여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김동삼은 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재만 독립운동단체를 규합하여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민족유일당을 결성할 때 개인중심이냐 단체중심이냐를 놓고, 개인본위 조직론과 단체본위 조직론이 심각하게 대립함으로써 김동삼의 민족유일당 운동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 무장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여생 바쳐
이에 김동삼은 굴하지 않고 참의·정의·신민의 3부 통합을 위하여 1928년 9월 3부 통합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역시 각 단체간의 이해의 대립으로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전체 통합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부분적인 통합이라도 이루고자 김동삼은 1928년 12월 3부의 일부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혁신회의를 조직하고 의장직을 맡게 되었다.
오직 각 단체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던 김동삼은 그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상해로 부임하지 않고 계속 만주에 체류하였다. 그는 국무위원이라는 명예보다 적과 인접해 있는 일선에서 무장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규모의 독립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는 길만이 국권회복의 지름길이라 판단하였다. 명예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독립투쟁 일선에서 자신의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이 더 보람있는 일이라는 그의 자세는 당시의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재만 한인 농민의 생활개선과 안정, 권익옹호에도 남달리 앞장섰다는 점이다. 1927년 4월 길림에서 35명이 이를 위하여 결성한 농민호조사의 활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김동삼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일본군이 만주 전역을 점령하자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마련하여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지속하기 위하여 북만주로 갔다. 이원일과 함께 다니던 중 1931년 10월 초순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고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되어 징역 10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3월 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애국애족 업적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9년 
신재홍 한국역사학회 회장


출처 : 광복의 역사인물 60명 중에 수록된 글에서 발췌하여 문경공(김안국) 네째아들인 연부님의 후손이 펴낸 책인 <문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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