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술잔에는

조회 수 4049 추천 수 100 2005.03.03 11:17:37
●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

아이들이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아버지가 받았다. 다짜고짜 하는 말.
"엄마 바꿔 주세요."

이번에는 아버지가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아이가 이렇게 전화를 받았다.
"엄마 바꿔줄게요."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봄이라 그런지 어깨는 축 늘어지고 몸은 뻐근하다.
교통지옥에 시달려 몸은 괴롭고 물씬물씬 땀 냄새를 풍긴다.
힘든 몸과 지친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빠 왔다"는 말소리는 마치 허공을 치는 것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식탁에 있는 과일 하나를 집어 드는데 "그거 애들 간식이에요"라는 아내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내는 나보다 하던 일이 더 중요한지 부엌으로 모습을 감춘다.
멀어져 가면서 외치는 아내의 외마디 소리.
"씻고 저녁 드세요."
"누가 밥 먹으러 왔나? 힘들게 일하다가 들어온 사람 좀 반겨주면 어디 덧나나?"
이런 생각에 마음은 더욱 착잡해진다.

"아이들은 어디 갔나?"
"방에서 공부할 거예요."
"공부, 공부, 공부… 아버지가 들어왔는데 인사도 할 줄 모르는 그런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섭섭한 마음을 다스리며 아이들 방을 들여다본다.
"공부 열심히 하니?"
달리 할 말이 없다.
"어,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짧은 한 마디를 하고 계면쩍은 듯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래, 열심히 해라"고 말한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요 뭐."
회사에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 물고 한숨을 내뱉던 동료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이 진정 인생의 전부인가?"

갑자기 역겨운  마음이 든다.    빈 의자로 둘러싸인 식탁.
"아이들은 먹었어요."
그러면서 저녁을 차려 주고는 연속극을 본다고 텔레비전에 몰두해 버리는 아내. 자기 남편은 본 척도 않고 미남 탤런트만 보는 아내.

"내가 뭐 때문에 먹어야 하나? 진정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삶인가?"
걷잡을 수 없는 숱한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가을이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하늘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이들은 내 손을 필요로 하던 나이가 지나버렸고 내 인생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
직장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주 지나온 일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회한이 생긴다.
조금만 슬픈 노래를 들어도 눈가를 자주 적시게 된다.
그동안 앞만 보고 살아온 내 모습이 이제는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자꾸만 주저앉아 어딘가에 기대고 싶다.

가족들에게 항상 강한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으로 버거운 짐을 힘겹게 지고 비틀거리며 서 있다.
어쩌다 삶이 버거워 펑펑 울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가장(家長)이라는 족쇄와 허울 좋은 남자라는 이유로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릴 수 없다.
오늘도 강한 척하며 속없는 너털웃음으로 위장하고 있다.

*출처: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다』中에서.
또한 2005.3.3 <호주제폐지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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