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촌년 10만원

조회 수 4146 추천 수 16 2009.11.06 12:18:15

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는 밥을 한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 뿌듯함과 오유월 폭염의 힘든 농사일에도 흥겨운 콧노래가 나는 등 세상을 다 얻은 듯 해 남부러울 게 없었다.
이런 노모는 한해 동안 지은 농사 걷이를 이고 지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한복판의 아들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제촉해 도착했으나 이날 따라 아들 만큼이나 귀하고 귀한 며느리가 집을 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자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노의 눈에 신기하기만한 살림살이에 눈을 뗄 수 없어 집안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뜻밖의 물건을 보게 됐다.
그 물건은 바로 가계부다. 부자집 딸이라 가계부를 쓰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을 해 그 안을 들여다보니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살림살이에 또 한번 감격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어디에 썼는지 모를 촌년 10만원이란 항목에 눈이 머물렀다.
무엇을 샀길래? 이렇게 쓰여 있나 궁금증이 생겼으나 1년 12달 한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지출한 돈이 바로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촌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아들 가족에게 줄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간 한해 걷이를 주섬주섬 다시 싸서 마치 죄인된 기분으로 도망치듯 아들의 집을 나와 시골길에 올랐다.
가슴이 터질듯한 기분과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통을 속으로 삯히기 위해 안감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금지옥엽 판사아들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 왜 안주무시고 그냥 가셨어요”라는 아들의 말에는 빨리 귀향길에 오른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
노모는 가슴에 품었던 폭탄을 터트리듯 “아니 왜! 촌년이 거기 어디서 자-아” 하며 소리를 지르자 아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며 말을 잊지 못했다.
노모는 “무슨 말, 나보고 묻지 말고 너의 방 책꽂이에 있는 공책한테 물어봐라 잘 알게다”며 수화기를 내팽기치듯 끊어 버렸다.
아들은 가계부를 펼쳐 보고 어머니의 역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소리 난다 소문이 날꺼고 때리자니 폭력이라 판사의 양심에 안되고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마련으로 몇날 며칠을 무척이나 힘든 인내심이 요구 됐다?
그런 어느날 바쁘단 핑계로 아내의 친정나들이를 뒤로 미루던 남편이 처갓집을 다녀오자는 말에 아내는 신바람이나 선물 보따리며 온갖 채비를 다한 가운데 친정나들이길 내내 입가에 즐거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남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하기만 했다.
처갓집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마당에 서 있자 장모가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들어오는가”하며 나오자 사위가 한다는 말이 “촌년 아들이 왔습니다”라고 대꾸하자 그 자리에 장모는 돌하루방처럼 굳은채 서 있자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잣집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라 말하고 차를 돌려 가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 시어머니 촌년의 집에는 사돈 두 내외와 며느리가 납작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빌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달부터 촌년 10만원은 온데간데 없고 시어머니의 용돈 50만원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했다.
이 아들을 보면서 지혜와 용기를 운운하기 보다는 역경대처 기술이 능한 인물이라 평하고 싶고 졸음이 찾아온 어설픈 일상에서 정신을 차리라고 끼 얻는 찬물과도 같은 청량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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