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한국인이 되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 본다  ---- * 이순복
과학이 낳은 물질문명의 무한발전은 세계를 한 울타리 속에 넣어 놓았다. 이른바 지구촌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렇게 5대양 6대주가 다 한 울타리가 된 이 시대에 한국인이 위대한 한국인으로, 자주국민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한국 민족관을 정립하여 세계문명의 발전에 기여보비하고 이를 시대정신에 맞게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면면히 이어나가야 할 것이니 지금 서있는 이 좌표가 참으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모름지기 4천5백만 한국인은 이를 통감하고 오늘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 자주국민으로 우뚝 서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시대정신이 우리의 길이라면 이를 금석에 새겨 실천하고, 떳떳하게 후손에게 넘겨주고자 4대 좌표를 설정하여 논지를 펼치고자 한다.

1. 역사속의 한국 혼
2. 물질문명속의 한국 위상.
3. 미래 세계의 한국 진로.
4. 도덕산업과 음식문화 창출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하게 발전한 지구촌의 환경에 적응하고 세계인의 향도적인 역할을 할 한국인의 진로를 설정하여 한국인이 지구촌의 중심 인으로 우뚝 서게 함이 본 논문의 취지요 목적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잊혀지고, 변질된 역사속의 민족혼을 되찾고자 함이요,

둘째 석 달이면 강산이 한 번씩 변한다는 快速쾌속문명 속에서 한국민족의 과학적 실상을 밝혀 시대사조에 順應순응 發進발진하고자 한다.

셋째로는 미래 한국민족의 진로를 밝히고자한다.
이는 광석을 캐내어 재련하고 목적한 금속을 만들어 내듯 민족의 힘을 재충전하여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어 가는 길이요 철학이다.

마지막으로 세계는 많은 성인이 왔다 가며 좋은 교훈을 주었으나, 이것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어 본말이 전도되고 말았다 하여 이제 믿을 것은 양심의 소리를 직접 들어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농경문화로 줄기차게 이어온 대한민국인이 5천년동안 살아온 농심의 소리를 온축(蘊蓄)하여 도덕이라는 상품으로 재가공하자는 것이고 또 농경문화가 끼친 음식문화도 세계화하여 발효음식이 인류를 구원할 식품임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농경문화가 가져다 준 음식문화는 수렵민족의 살육을 통하여 얻는 음식에 비하여 도덕적이고 이성적이며 유전형질에도 친화적임을 강조하며 이를 산업화하고 세계인마저 실용화하게 하여 이상세계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1. 역사속의 민족위상
민족위상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민족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칭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한국에서 낳아서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말을 쓰며 한국인만이 간직하고 있는 고유한 문화와 풍속 속에 젖어 있기에 한국인 이라 하는 것이다.

혹자는 한국인을 말하면 그 조상의 혈통의 순수성을 말하나 혈통이란 문화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는 인류학적으로도 한국인은 남방계와 북방계의 이민족들의 피가 서로 섞여 혼혈인으로 되어 이루어진 종족이며 역사적으로는 원의 침략, 병자호란의 발호(跋扈)로 말미암아 북방계의 피를 수혈 받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8년 동안에 남방계의 피를 흡족하리만큼 수혈해 주었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그런가하면 근래에는 한국여성의 탈 농촌화, 탈 혼인화 경향이 뚜렷하여 농촌을 중심으로 이민족의 피가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점진적으로 폭발적으로 다량 수혈하게 되었다. 그러하므로 이제는 지리, 풍속, 언어, 문자 등등 문화적인 한국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한 것이지 혈통의 순수성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그 태생적인 운명이라는 수레바퀴가 한국인을 형성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운명적인 한국인은 이제 한국이라는 땅을 의지하여 그 땅을 위하여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고 빛나는 나라. 빛나는 민족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의무와 본분을 가졌다 하여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이라는 본래 좋은 토양을 가졌으나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하여 국토는 양단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한국인은 두 개 이념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원하지도 않는 남이 준 이 이념은 동포형제를 극한투쟁으로 내어 몰았다. 그로 말미암아 남북은 전쟁을 치러야했다. 그런데 그 피의 대가는 날이 갈수록 두 나라를 이질화시킨 것이 사실이다.

이 이념이 갈라놓은 국토양단은 지금으로서는 통일될 날을 전혀 기약할 수 없다. 한민족 두 체제국가로 불행하게도 고착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 두 개의 이념, 두 개의 국가는 민족의 동질성을 크게 훼손시키고, 국방비의 과대한 출혈을 강요하고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양대 이념의 출혈경쟁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민들의 고통을 과중하게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동포형제를 원수로 갈라놓은 것이다. 거기다가 빈약한 부존자원과 인구과밀이 만들어낸 국가의 노화현상은 미개국이라는 허물을 덜어내는 데 한계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한민국은 교육의 힘을 바탕으로 세계사조에 발맞춘 산업화로 변신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국부는 중화학공업과 조선. 자동차 산업 그리고 IT산업으로의 변신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신봉이라는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 기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복지국가 건설과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의 변화가 국력신장에 크게 짐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남과 북의 대치. 인구의 고령화, 과다한 산업재해, 부존자원의 빈약, 3D업종 기피현상은 한국의 경제를 早老現象조로현상을 보이게 하며, 미래경제성장에 한계를 드러내게 하였다. 그런데다가 여성의 脫 家事化, 탈 姙娠化는 국력신장에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먼 장래를 바라볼 때는 부정적인 면도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주국방, 보건복지, 환경공해, 노동인권, 교육예산의 신장으로 다소의 경제적 성공이 있었다고 하나 이대로는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버거운 경제로 가히 한국경제가 탈진상태임을 부정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산업국가가 모두 다 포퓰리즘에 깊숙이 발이 빠졌다는 사실이다. 이 포퓰리즘 바람이 대한민국도 예외일 수 없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좌파정권이 들어서고 포퓰리즘이 10년 동안 안방을 차지하더니 노인국화 경향이 뚜렷한 나라로 되고 말았다. 이런 형편에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지상목표는 과중한 짐으로 보여 진다. 수출에만 의존하는 산업구조 속에 턱없이 모자란 예산으로 복지를 갈망하는 신식한국인의 입맛을 맞추는데 버겁다는 이야기다. 하니 이상은 높고 갈 길이 먼 한국정부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고민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의 불화살을 가슴에 꽂고, 부존자원부족과 노령인구를 업고 가야하는 버거운 경제현실인 것이다. 벌어들이는 것은 한정되어 있는데 써야 할 곳은 너무나도 많은 현실인 것이다. 우선 국민 대다수의 욕구충족을 위한 복지사회 구현과 국민의 안전보장을 위한 자주국방과 국력의 원천인 충분한 교육구현은 수지균형을 크게 흔들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 건설과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신분상승은 불가피한 것으로 우리는 이 역사적인 과업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하기 위해서 몇 가지 목표를 설정해 본다.

가. 민족의 동질성 확보
나. 南韓중심 민족국가의 추구
다. 자유민주주의의와 시장경제 신봉

민족의 동질성 확보는 민족생존에 그 가치를 둔다. 민족국가의 추구는 남한 중심의 통일국가 성공에 그 목표를 둔다. 자유민주주의의와 시장경제 신봉은 민족의 항구적인 행복에 그 기준을 둔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민족의 생존과 통일국가의 성취를 통하여 항구적 행복을 향유하는 복지국가 건설인 것이다. 한나라가 세계 속에서 완전한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 안전보장이 확보된 국력
나. 자주국가의 선민 출현
다. 國風 國基 國脈 國光 國學 國法을 기초한 역사 정립
라. 부국강병과 효제충신
마. 중산층 두껍게 확보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천국과 극락이 있고, 국가 다음으로 모든 종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신은 위대하나 국가만큼 나를 보호할 수 없다.

우리는 충신을 말할 때 박제상 정몽주를 말한다. 국방의 안전보장을 말할 때는 서희나 강감찬, 권율이나 이순신을 말한다. 혹자는 이율곡의 십만양병론을 들기도 한다. 그들은 다 같이 원대한 꿈과 포부를 가지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받쳐 실천하신 분들이다.

이분들의 뜻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힘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힘이란 무엇이냐?’
한국인의 힘은 자유 독립의 힘이다. 애국애민의 힘이요, 대의명분의 힘이요, 합의도출의 힘이요, 건설협력의 힘이요, 과학진흥의 힘이다. 자비긍휼의 힘이요, 세계평화의 힘이요, 살신성인의 힘이요, 창의개발의 힘이요, 문화창달의 힘이요, 브랜드창출의 힘이다. 이 힘을 갖출 때 우리는 지구촌에서 대접받고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촌에서 다들 부러워하는 민족국가로 살아남아야 한다. 모범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 21세기는 어쩜, 하늘이 우리에게만 크게 시간을 할애해 준 때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유엔의 안방으로 들어가 그 심장부를 우리가 차지했다. 2002년 월드컵 축구의 4강 신화를 이룬 후로 세계를 놀라게 한 여러 명의 빼어난 운동 스타들이 나타났다.

‘체력은 곧 국력이다’ 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입증한 셈이다.

국토가 넓다고 위대한 나라가 아니다. 바다가 넓다고 건강한 나라가 아니다. 인구가 많다고 힘 센나라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전쟁을 잘한다고 역사를 짊어지고 갈 나라가 아니다. 위대한 국민성을 가진 나라가 건강하고 위대한 나라가 된다. 위대하고 건강하고 훌륭한 역사를 가진 국가가 되려면 위대한 국민성을 함양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성은 나라의 뿌리요, 근간이요, 꽃이요, 열매다. 국민성이 곧 국가의 苗根花實묘근화실이다. 국가의 장래요, 미래인 것이다.

오죽하면
‘그 나라와 나라의 싸움은 초등학교의 교실에서 시작되어 교실에서 끝이 난다’고 했을까?!

공자성인께서는 논어에서 말씀하시기를 ‘君子務本군자무본 本立而道生본립이도생’이라 하였다. 군자(책임성이 있는 사람)란 근본(義務, 本分)에 힘쓴다. 근본이 서야 바른 도리가 생겨난다. 이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표현한다면 관리자든, 사업가든, 군인이든, 교사든, 농부든 어부든 학생이든, 주부든 기본에 힘 써야 한다. 기본을 충실히 해야 한다. 그래야 매사에 흔들리지 않는 질서가 생기고 모든 사업이 성공을 이룬다는 말이다.

성공을 이룬 자는 기본이 잘된 자다. 그 기본이 잘된 자란 어디 어느 곳에서도 항상 적응능력이 뛰어난 자다. 그렇다면 적응능력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기본이 충실할 때 생긴다. 그런 기본이 잘되고 적응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세계의 험난한 시장에서 우리가 생산한 제품을 꾸준히 많이 팔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업 삼성이나 LG의 외국지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기본이 충실하기 때문에 세계시장을 선점하고 그리고 지키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중동 전쟁 중, 타국지사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로 다들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우리지사 직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판매망을 지켰다는 것이다. 또 멕시코에서 발생한 돼지 신종 바이러스로 세계인이 공포에 떨 때에도 더위를 무릅쓰고, 마스크를 쓰고, 판매망을 지키고 넓혔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孝悌忠信효제충신의 본보기 사건이다. 부모를 사랑함이여, 나라를 위하는 한 조각 붉은 마음의 발로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지역을 탓하지 않고, 우리가 생산한 제품을 세계시장에서 당당하게 팔았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지 근본이 충실하고 근본을 중요시해야 이런 위대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국가의 근본은 무엇일까?’
국가의 근본은 국민의 성질이 근본이 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성질이란 무엇인가? 국민의 마음가짐이다. 즉 국민의 성품, 성격, 성질, 성향이 밑바탕이 된다. 한 나라의 근본 바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국방, 과학, 법률, 종교와 철학 및 도덕으로 세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둘로 크게 나누면 형의상학적인 부분과 형이하학적인 부분으로 대별할 수 있으며 이는 역사와 풍속, 언어와 문자로 담을 수 있고 그것이 국민의 모든 생활 영역과 가치관까지도 다 감싸 안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그 국민에게 언어가 있는가? 문자가 있는가? 역사가 있는가? 풍속이 있는가? 그리고 영속될 국가를 가졌는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우리 국민은 이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진 국민이요, 민족이다. 이런 자랑스러운 바탕을 가진 한국인이다. 이런 위대한 바탕을 가진 민족이 위대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이런 것이 결여된 민족은 열등한 나라를 만들 수밖에 없다. 나라의 힘은 그 국민의 성질 즉 바탕을 넘어 존재할 수 없다. 그 바탕을 질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관이 필요하다. 정직한 인생관이 필요하다. 줄기찬 국민교육이 필수적이다. 포용성 있는 세계관이 뿌리내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창조의 힘이 바탕이 된다. 창조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국조의 綿綿면면한 陰佑음우와 거짓 없는 땅의 순박함에서 온다. 땅을 사랑함이여! 조상을 받듦이여! 창조의 맥박이 고동치리라.

단군 성조의 弘益人間홍익인간 理化世界이화세계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세계를 包容포용하고 세계인을 抱擁포옹하라고 주신 여덟 글자라 믿는다. 우리의 바탕은 이미 5천년 넘어서부터 예약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국가의 한 사람이요, 이런 민족의 한 사람인 것이다.

‘한국인의 이상적인 바탕은 어떤 것일까?’
한국인의 가장 이상적인 바탕은 환경에 빠르게 馴致순치되는 것이다. 적응하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사람이 땅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다. 불경에는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의지하여 일어날 수 있다.’고 갈파하였다. 인간은 누구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 성스런 어머니 땅을 기초로 하여 투철한 주인의식과 창조정신 그리고 역사의식을 가지고 어떠한 위기나 난관에 봉착해서도 오뚝이같이 벌떨 벌떡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밴 한국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국토를 가졌기에 5대양 6대주를 다 누비며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한국인이다. 이 한국인의 끈기와 슬기, 그리고 투철한 감투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탕을 지닌 사람이 모름지기 한국인인 것이다.

2. 물질문명속의 한국민족의 위상
이제 인류역사의 여명이 깨어지고 태평양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시아 시대가 열리면서 우리는 서해안시대를 맞이했다. 과거 6-7세기에 찬란했던 황해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原始返本원시반본이라 했던가? 다시 일본의 스승의 나라로 등극할 날이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어깨위에서 날개라도 돋칠 성 싶은 비상의 시간을 꿈꾸어 보는 것이다. IT산업, 생명공학, 조선. 자동차 산업이 우리의 미래다. 녹색환경산업도 그러하다. 항공우주로의 꿈도 접을 수 없는 우리의 산업이다. 그러나 식품산업과 높은 도덕성도 빠뜨려서는 안 될 위대한 산업이다. 서양을 횡횡하던 기독문화가 그 밑바닥을 드러냈다. 세계는 그 뿌리가 같은 기독문화권과 회교문화권의 갈등으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현실이다.

미래는 높은 도덕상품과 氣稟기품있는 산업두뇌의 싸움이다. 지식정보로 인한 전쟁사회란 뜻이다. 그 미래의 전쟁터란 초등교육의 현장이다. 조기교육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不可遠불가원 不可近불가근의 두뇌전쟁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우리는 다행히도 일본보다 몇 십 배 폭넓은 언어문자를 가지고 있다. 600년 전에 예견된 컴퓨터 문자를 세종대왕이 창조해 주셨다. 비록 일본의 가나문자가 우리의 문자보다 500년이 앞서서 口碑文學구비문학의 꽃을 일찍 피워 노벨문학상이 먼저 나왔으나, 앞으로 언어문자의 시간은 한글을 당할 문자는 없다할 것이다.

측우기를 만들고, 水標를 만들어 자연재해를 막으려 했던 조상의 지혜는 오늘의 세계인이 다 회자하는 바이다. 그런 슬기가 우리에게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에서 IT산업 선도주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造船조선 한국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철강 한국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우리에게는 튼튼한 초석이 놓아졌다. 눈에 보이는 초석은 다 만들어져 있다. 산업인프라가 완전하게 구축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은 의식의 세계에 주인 노릇을 할 그 바탕에 의문이 있다. 잘못된 역사가 그러하고, 잘못된 정치관이 그러하고, 아주 잘못된 관행이 그러하며, 못난 이념이 독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크게 가능성이 있는 것은 우리는 일찍이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국민정신의 앙양고취를 통하여, 주인의식을 찾겠다는 국민적인 의지를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저력이 있다. 이 주인정신 주인의식을 승화시켜 다시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는 도덕국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3 미래속의 한국민족의 진로
20세기 격동기에 산업화를 완성한 한국인이 가장 이상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길은 올바른 의식과 차원 높은 덕성과 격조 높은 품격과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의 소유자로 우뚝 서는 것이다. 부정적인 요소와 패배주의의 잔재를 다 긁어내고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智達的지달적이며 성취감에 불타는 野望人으로 서야 할 것이다. 5대양6대주가 다 우리들의 싸움터요, 일터요, 사냥터요, 놀이터요, 명상의 자리요, 성취의 자리요, 도통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6가지의 덕성이 요구된다.

가. 참고 견디어라.
나. 양보하고 화합하라.
다. 즐겁고 명랑하라.
라. 힘차고 용감하라.
마. 슬기롭고 성실하라.
사. 꾸준히 공부하라.

-참고 견디어라.

우선 인내에 대한 설명이다. 인내란 참고 견디는 것이다. 우리는 三忍三思삼인삼사란 말을 흔히 사용한다. 참을 忍자는 刀와 心자가 합한 글자이다. 잠을 못 이겨 책상위에 칼을 꽂아 놓고 공부하여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다. 예전에는 칼이 가장 가까운 무기였다. 무인은 다 칼을 지니고 다녔다. 자신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그랬다. 열녀는 칼을 차고 정절을 지켰다. 칼로써 마음을 지키는 모습이 인내라고 생각한다. 칼로 마음을 도려내며 참고 견디는 모습이 忍이라는 글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思자는 田과 心자를 합한 글자다. 마음 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마다 다 마음의 밭을 가지고 있다. 이 밭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智慧人지혜인이 된다. 생각을 깊게 하는 사람은 넓고 큰마음 밭을 소유한 사람이다. 우리는 넓고 큰마음 밭에 잡초를 뽑아내고 아주 깨끗한 밭으로 가꾸어 자신이 원하는 열매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사에 세 번쯤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 세 번의 여유를 다른 말로는 三忍이라한다. 그리고 이 삼인과 삼사를 합하여 세 번 인내하고 세 번 생각하자는 것이 三忍三思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날, 오전 9시 30분 전 대통령 한분이 서거했다는 방송을 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국의 至尊지존의 자리를 5년씩이나 차고 있었던 분이 자기 마을뒷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자실했다.

그는 유언에서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다.’ 라고 표현했다. 처음에는 불가의 生死一如생사일여를 의역한 말로 전해졌다. 그런데 자연의 한 조각이나 일여라는 말이 얼마만큼 다른지는 모르나, 도통하신 분들은 생과 사를 하나로 본다. 그러나 범부중생들을 남겨놓고 죽음을 택한 그 분은 三忍三思가 필요했다고 말하고 싶다. 세 번 참고 세 번 더 생각했더라면 이 땅에서 맺었던 수많은 범부인연중생들에게 눈물을 그토록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사모를 위시한 386세대의 추종자와 일가친척 그리고 직계존비속이 강물처럼 많은 눈물을 쏟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 우리 한국인은 중대 결심을 할 때에도 평상심을 가지고 항상 생활하는 그 공간에서 참고 견디는 연습을 많이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부부간의 불화를 이겨내는 인내. 형제간의 불화를 이겨내는 인내. 백수가 되어 빈손으로 살다보니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일을 이겨내는 인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세상 밖으로 던져진 허전하고 우울함을 이겨내는 인내. 취직이나 승진탈락의 고통을 이겨내는 인내. 별리의 슬픔, 병마의 시달림, 구설의 아픔. 고독. 격분. 울증. 울분 등등 수많은 고통과 고충을 이겨내는 참고 견디어 내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살기 때문에 당연히 거쳐야할 과정이라는 것을 익혀 두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만이 겪어야 할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눈물 젖은 빵을 예찬하기도 하여 성공이라는 떡을 얻어낸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인이 오대양육대주 그리고 북극 남극에서 견디어 내는 것은 삼인삼사라는 조상이 물려주신 참고 견디는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믿으며 그 만큼 견디었기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설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냄비정신을 화장하자!’
매장문화로 전국토가 공동묘지가 될 뻔했는데 모재벌회장이 호화분묘를 마다하고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기므로 화장문화의 물고를 텄다. 그 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긍정적으로 참여하여 晩時之歎만시지탄이나 우리 사회에 화장문화가 접목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그 유언에서 ‘화장을 하고 작은 비석하나 고향마을에 세워라.’ 하므로 앞으로 우리나라는 화장문화가 보편화될 공산이 크다.

또 고 노 전 대통령은 국립묘지를 외면하고 고향선산에 안치하므로 지도층과 부유층에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사건으로도 기록될 것이다. 헌데 왜? 필자는 냄비정신을 화장문화와 결부시켜 이야기를 하는지 독자 여러분은 궁금해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있다. 그토록 매장을 선호하던 우리가 지도급 인사들이 길을 내므로 돌연히 변한 화장문화로 전환되어가는 현실을 두고 ‘우리는 할 수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민족성의 가장 문제가 되는 냄비정신을 덜어낼 수 있다는 희망인 것이다. 여기서 냄비정신은 인내나 끈기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너무나도 망각이 심한 민족성의 결여를 말하는 ‘냄비정신’이다.

6. 25의 아픔을 다 잊어버린 우리는 지금 이북의 핵 앞에서 쩔쩔 맬 시간만 남겨두고 있다. 이북은 우리가 잘못 판단하여 준 돈으로 핵을 만들고 대륙간탄도탄을 개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핵보유국인 이북은 이스라엘이 아랍을 호령하듯이 그 보다 더 가증스럽게 우리를 호령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상주의에 빠진 일부 국민과 종북주의자들은 한 입으로 두 말을 서슴없이 내고 있다. 이 냄비는 조속히 오그라뜨려서 다른 제품을 만들어 내어야 할 것이다. 무쇠솥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불의를 보고도 참고 견디는 것은 올바른 국민의 태도가 아니다. 이북의 도발이 눈앞에 왔는데 兩舌양설을 하는 것도 국민의 태도가 아니다. 이북 통치자 김정일의 학정을 못 이겨 도망 나온 새터민이 15,000여 명이라 한다. 그중에서 그들의 지도급 인사들이 외치는 목소리는 한결같다.

‘이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감상주의에 빠지지 말라!’
그들은 그렇게 경고한다. 헌데 우리는 인내하며 참으며 이북이 변하도록 가까이 가서 도와주자. 기아에서 죽어가는 동포는 외면할 수 없다. 비료를 주자. 쌀을 주자. 의약품을 주자. 달러를 주자고 외친다. 이 일의 앞잡이는 종북주의자와 감상주의자들이다. 일부 종교인이다. 그들이 자기 돈으로 주라하면 줄 것인가? 입으로 나불거리며 빌어다가 준 돈 중에 자기 돈은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혹 이북을 돕는 일로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나서는 것은 아닌지도 묻고 싶다.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릴지 묻고 싶다. 이렇게 이북을 돕는 일을 두고 인내하는 일은 인내가 아니다. 만용이다. 산도둑을 안방에 들여놓고 아내를 주고, 자식을 주고, 재산을 다 주고, 자기는 거지가 되어 유랑자가 되겠다. 고 하는 그런 것은 만용이다.

참고 견디는 데는 반드시 경계가 있어야 한다.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과학자가 근성을 가지고 자기 목표를 향하여 목숨을 내어 놓고 연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진정한 끈기요, 인내다. 고산 히말리아를 정복하는 인내는 인류의 정신문화에 크게 공헌하는 인내가 된다. 병사가 155마일 휴전선에서 혹한을 견디며, 이를 갈며 철조망을 지키는 그 모습은 참된 인내다. 병이 들어 환부를 덜어내어야 하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참는 것은 바보의 짓이다. 화재가 났는데 기도를 하여 불을 끄겠다. 병자도 기도를 하여 병을 고치겠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좋은 대학을 가겠다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것도 바보의 짓이다.

인내란 목표를 정해두고 인간의 열정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리는 모습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부국강병으로 만드는 길도 올바른 목표를 설정해 두고 참고 견디어 인내할 때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忍耐觀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위하여 언어심사 간에 행동거지 간에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적들은 우리의 나태와 방심의 그 순간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마치 몸을 말려 죽이는 병원균이나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양보하고 화합하라.

양보할 때, 겸양지덕을 발휘할 때, 겸손하게 처신할 때 화합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화합을 말할 때 화목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할 때가 많다. 아무튼 화목이든 화합이든 화친이든 화기애애든 화자라는 글자에서 비롯되어 우리의 감정을 아주 편안하게 해주는 상태라고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이 和화라는 글자를 심도 깊게 살펴보면 벼화 禾자 변에 입구 口자를 합쳐진 글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풀어서 말하면 벼 즉 쌀과 구 즉 입이 함께 모인 글자이다. 사람의 입에 쌀밥을 넣어주는 일이 和인 것이다. 그러니까 화라는 것은 먹는 것이 불편함이 없이 넉넉할 때 가능하다는 말로 이해된다.

우리는 직장을 다니면서 급료를 받는다. 이 급료는 많이 받는 사람도 있고, 적게 받는 사람도 있다. 그 적고 많은 차이는 그들이 책임지고 하는 일의 차이, 일을 해 내는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그런 원칙이 무너진다면 화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마다 일어나는 소위 노동운동의 가장 첨예한 기간인 夏鬪하투라는 것이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합세하여 하투를 벌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리되면 이 나라는 금방이라도 박살이 날 것처럼 시끄러워 두렵고 무섭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나는가? 이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상식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왜 이런 아주 상식적인 일이 해결되지 않아서 나라가 들썩이게 되는가? 그 답은 노. 사 중 어느 누군가가 크게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그렇다. 그 입에 쌀을 자신만이 많아 넣겠다고 하기에 和화가 禍화자로 변한 것이다.

재앙을 나타내는 禍화자를 풀어보면 示시, 즉 보인다는 시자와 窩와, 즉 감춘다는 것이니 示窩의 결합이다. 서로 보아야 할 것을 감추는 모습이다. 하여서 감춘 것을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도록 투명하게 하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것이 재앙을 말하는 禍이니 먹을거리를 고르게 나누어서 입에 넣어 배가 부르도록 하는 것(和). 먹을거리를 특정인이 감추어 두고 한 쪽에서는 배가 고프게 하는 것(禍)의 차이인 것이다.

경상도 정권이 머리수의 힘을 믿고 정권을 독차지하여 호남 푸대접을 만들고 충청도 무대접을 만들 때, 정치적 불안정이 생겨나 정치판이 편싸움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이 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화합이 깨어져서 광주사태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고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고 변형시켜서 사회불안 요소를 만드는 일은 모두다 화합이 원활하지 못한 때문에 발생하는 불행한 사태이다. 수도권 편향의 정책은 고쳐야 한다. 도시편향의 정책도 고쳐야 한다. 부익부 빈익빈의 가난의 대물림도 시정해야 한다. 좌파 우파식 이분 논리도 부셔야 한다. 모든 것을 국회를 통하여 공사는 無私政무사정이라는 원칙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골고루 발전해야 화합이 이루어진다. 이 화합은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 주고 받쳐주는 謙讓之德겸양지덕이 넘쳐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런 문화의 정착을 위하여 초등학교교육에서부터 겸양지덕을 갖춘 순화된 사람을 배출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즐겁고 명랑하라.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명랑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낙락천적인 국민이 되어야 한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꼬마 아이가 아침에 책가방을 챙기고 준비물을 챙겨서 대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저리도 기분이 좋을까? 무엇이 저 아이를 그토록 즐겁게 하기에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학교를 가게 하는 것일까? 저 기상으로 학교를 가서 공부한다면 선생님이 하시는 말, 백 개면 백 개가 다 머릿속에 각인되리라. 아이는 분명히 좋은 성적을 받으리라.

‘나도 저렇게 활기차고 명랑한 시절이 있었을까?’
‘사람은 어떨 때 저 아이와 같이 활기차고 명랑할까?’
‘사람의 본성이 저런 것일까?’

저 아이와 같은 모습이 모든 한국인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즐겁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잘 분비되어 즐겁게 산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학자의 말이고 낙천적인 사람이 되려면 긍정적이고, 포용력이 있고, 매사에 관용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된다. 창해와 같은 푸르고 드넓은 마음을 가질 때 사소한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즐겁고 명랑한 삶이 되는 것이다.

내 마누라는 하루에 죽는다는 말을 백번도 더 한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모두 부정적이요, 불만스런 것이요, 짜증나는 것을 토해내는 것이 생활의 전부다. 애써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서 가족들이 먹을 식탁위에 올려놓고도 인상을 쓴다. 웃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남들과는 상당히 오순도순 이야기도 잘하지만 가족과는 아주 냉기류이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도 아프단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없다. 그러더니 50살이 되자 허리 협착증이 왔다. 또 손가락 마디마디에 관절염이 왔다. 별로 많이 먹는 것도 아닌데 허리가 드럼통처럼 커졌다. 식료품을 파는 시장을 자유자재로 갈 수 없을 만큼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입안이 아파서 음식 맛을 모른다고 한다.

‘말이 씨가 된다.’
옛 부터 어른들이 하신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녀는 날마다 죽는다. 죽겠다. 아프다. 아파 죽겠다. 못 살겠다. 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고 보낸다. 그 말을 바꾸어서 아주 긍정적인 말로하면 삶이 질박해 질 텐데...늘 복이 넘쳐 날 텐데... 함께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많이 안타깝다.

우리말에 ‘인연’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연인이 된다. 놀라운 발견이다. 인연이라고 바라만 보는 삶은 즐거운 삶이 아니다. 명랑한 삶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서 연인관계로 끌어오면 당장 그들이 선 그 자리는 천국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우리말의 뉘앙스가 이리도 풍부한지 놀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멀리 두고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요리하며 살 필요가 있다. 아주 적극적인 삶과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 때에 우리는 명랑하고 즐거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성인은 논어 학이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學而時習,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배우고 익혀서 기쁘다. 친구가 찾아와서 기쁘다. 군자가 되어서 기쁘다. 학문, 친구 군자. 이 세 가지의 기쁨을 공자성인은 인간의 가장 큰 기쁨으로 본 모양이다. 공자가 그랬듯이 우리도 배우는 것이 기쁘고, 멀리 있는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나면 기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밭(心田)을 가꾸어 그 성취를 본다면 얼마나 기쁠까? 예수는 심전개발이 된 사람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하였다. 석가는 심전개발이 이루어진 사람을 覺者라 하였다. 그런데 공자는 심전개발이 된 사람을 아주 평이한 말로 군자라고 표현했다. 그 군자는 배운 것이 별로 없어서 지식이 있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성내지 않는 자를 군자라 했다. 성내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석가는 無明무명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성을 낸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예수는 사랑이 부족하여, 온유하지 못하여 성을 낸다고 하였으니, 성인의 눈은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 아무튼 공자는 군자란 가장 이상적인 지성인으로 표현했고, 이들이 天人合發천인합발을 할 수 있는,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이 군자, 즉 지성인은 성내지 않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으나 그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성내지 않은 묵직한 사람으로 언행이 일치된 인격체를 말한다. 그는 仁義禮智信에 어긋나지 않은 실천인이다. 하지만 공자성인이 정의한 그 사람도 물질만능의 세상, 지식정보사회, 글로벌한 세상에서 仁義禮智信을 다 지키고 가리고 살기는 퍽이나 어렵다. 공자성인의 시대와 지금은 현격한 차이가 있기에 그렇다. 그렇지만 군자는 이 시대의 具色구색에 맞게 하나의 기능인으로 장점과 강점을 살려서 자신의 평안을 만들어 내는 智慧人이 될 수는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지혜인으로 살려면 자연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직업을 사랑하고 진리를 숭상하고, 보편평등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자신의 주인노릇을 못하고 어떤 신이나 인격체에게 종속되어 부자유스럽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즐겁고 명랑한 삶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天地之間 萬物之衆에 唯人이 最貴하다.’
동양사상이 천부인권설보다 더 앞선 것이라면 위의 말일 것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 그 가운데서 가장 귀한 존재다. 귀신보다도 더 귀하고 신들보다도 더 귀한 존재가 인간이다. 동양에서도 창주주니, 조물주니 하여 천하 만물을 지어 낸 인격체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귀함을 이리 강조함을 보면 인간의 위상을 가히 짐작하리라. 그런데 어쩌다가 못난 인간으로 변하여 돈을 싸들고 가서 구걸을 하고 재물을 퍼 던지며 죄를 사해 달라는 얼토당토 않는 짓을 하며 구속되어 사는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난다. 어찌 그 삶에 즐거움이 있으랴. 어찌 그에게서 명랑을 이야기할 수 있으랴. 토요일 일요일이면 자유를 잃어버린 매인 몸이 된 사람들의 그것을 어찌 절제라 말하리. 언제 어디서나 나를 내가 주장하는 자유인이 각자요, 重生중생자요, 군자인 것이다.

모름지기 자기 자신이 주인 됨을 알고 주인을 찾아 진정한 즐거움과 명랑함으로 자신을 가꾸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즐겁지 말라 해도 즐겁고 명랑하지 말라 해도 명랑했던 시간이 있었네.’
가만히 지난 삶속에서 저렇게 활기차고 명랑해진 때가 있었는가? 되짚어 보니 있었다. 중매인의 소개로 아내 될 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고, 신행을 가고, 집으로 돌아오던 때가 연상되었다. 그리고 주식을 몇 억 원 어치를 샀는데 상한가를 두 번을 쳤을 때 무작정 그리도 활기차고 명랑했고 세상이 온통 장밋빛으로 보였다.

그런데 죽어버리고 싶다고 하는 자살 충동을 느끼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 많아 활기와 명랑이라는 단어를 잊고 산지 오래이다.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사는 것이 인생’
살아보니 사람이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산다는 말은 맞은 말인 것 같다.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즐겁고 명랑한 분위기를 만들어 사는 창조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하나님이요, 부처님이요, 옥황상제님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은 인간이 신을 발명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말이다.

‘신의 창조주는 인간이다.’
‘성경도 불경도 인간의 아들들이 쓴 책이다.’

인간만이 가장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조금 겸손하게 말하면 천손민족 한국인이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혈통이라서 창조적이며 우주적이므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명랑하고 즐거운 삶을 가꿀 수 있는 적임자란 말이다.


-힘차고 용감하라.

용감한 자 두려워하지 않는다. 용감성은 용기에서 비롯된다. 용기는 강한 것이다. 씩씩한 것이다. 적극적인 것이다. 늠름한 것이다. 기상이 양양한 모습이다. 진취적인 것이다. 자주적이고 활달한 것이다.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고 과단성 있는 모습이다. 臨戰無退임전무퇴 정신이 용감한 자의 정신이다. 물러서지 않고, 비겁하지 않고, 허약하지 않는 모습이다.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것이 아니다. 용감한 자는 박력이 있고 강한 실천력이 있다. 뜨거운 열정이 있어 뜨거운 행동력이 충만하다. 용감한 자는 역경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고,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과대망상적인 행동은 용감성이 아니다. 만용이다. 범을 맨주먹으로 떼려 잡는다는 용기는 만용에 속한다. 깊은 강을 걸어서 건너는 것도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약자를 억누르고 강자에게 아부하는 것은 참으로 못난이의 행동이다.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고 현실도피적인 자살은 참으로 勇者용자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60년 헌정사에 자살하는 대통령을 가진 羞恥國수치국이 되었다. 자신의 치세 당시의 여러 가지 복합적인 불유쾌한 일들 때문에 피의자로 검찰청을 드나들고 메스콤의 지탄을 받는 일을 수모로 느끼다가 그 결말을 보지 않고 중도에서 자살을 택하여 동정심을 유발시킨 사건은 참으로 용감한 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죽음으로 자신의 과오를 씻는다는 것은 일본의 사무라이나 야쿠샤가 행할 만용일 지언정 대통령을 지낸 책임 있는 자리를 거쳐 온 지도자로써 취할 도리가 아니다.

‘자살’이란 말을 뒤집어서 읽어보면 ‘살자’ 라는 단어가 된다. 우리말의 위대함인지 우연히 된 말인지는 모르나 제 몸을 죽여야 할 고통에 처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 쯤 이 단어를 상기해 보아 죽음의 이 쪽 바로 그 옆자리에 삶이 염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용기 있는 자는 사형언도를 받고 사찰로 피접을 다니고 국민의 지탄을 받고 엄청난 거액을 숨겨 놓고도 살아서 내가 한 때 대통령을 했노라고 살고 있는 또 다른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삶이 영광되지 못했다 손 치더라도 살아남아서 자신의 과오 앞에 충실한 이가 용감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인간에게 단 하나의 목숨으로 주어진 생명을 무겁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를 굳게 지키고 과오가 있다면 숨을 쉬면서 그 과오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 대인의 길이라 믿는 것이다.

용기에는 두 종류의 용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정신적인 용기요 하나는 육체적인 용기다. 정신적인 용기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그런 용기다. 면암 최익현, 민영환과 같은 이의 용기가 충신의 용기이고 정신적인 용기다. 효자 효부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손순과 같은 효자가 있는 가하면 벼리덕이 공주와 같은 효녀도 있다. 이들은 다 정신적인 용기를 낸 자들이다. 육체적은 용기는 무엇일까? 이 육체적인 용기를 자칫 씨름선수나 복싱선수 또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생각하면 안 된다. 이들은 하나의 기능을 익혀서 그 결과물로 이름을 낸 사람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육체적 용기란 죽음을 불사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자신이 목표한 바를 얻어낸 이들이다. 예를 들면 고려 때 걸안의 침략 앞에 두려움을 모르고 적진에 뛰어들어 담판을 해낸 서희 장군이나 일본제국주의를 향하여 몸으로 대항하며 임시정부를 상해, 중경 등등으로 옮겨 다니며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고 평생을 바친 김구선생 같은 분이 육탄으로 용기를 낸 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의인들의 후예인 대한민국을 지켜온 사람들 중에 우리 역사를 빛낼 이가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암담하다. 이는 사회의 정의가 정신적인 것이 아니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닌 실용실질주의 세상이 되고 보니, 우리들에게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용기를 낸 이를 발견할 수 없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이는 물질만능주의 세상, 형식이 아닌 실질을 숭상하는 세상, 산업사회화 세상에 살다보니 물질의 위력이 모든 것을 압도하므로 예전과 같은 용기 있는 이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되니 더구나 중책을 맡은 이들이 그 삶의 질을 정신에 두지 않고 외형과 실질에 두다보니 현실이 이렇게 안타까운 것이다. 그 결과는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과 그 사람들의 주변 사람까지도 황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선인들은 인간이 禮와 義를 벗어나면 진정한 용기의 삶을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와 의는 당연히 황금으로 표현되므로 못가진자는 예와 의를 주장할 수도 없고 빈 입으로 예와 의를 말한다 할지라도 이는 소리를 내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예와 의의 의사표시는 현금이라야 믿는 세상’

그렇다. 이 세상은 황금주의 세상이다. 돈이 일을 하고, 돈이 행세를 하고, 돈이 예의를 나타내고, 돈이 의리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하여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는 것이다.

고대 희랍인들은 ‘행복은 자유에서 오고 자유는 용기에서 온다.’ 고 하였다. 그러나 행복은 돈에서 오고 용기마저 돈에서 온다. 는 말이 지금 이 세상에서는 가장 유효적절한 말이 된다. 용기마저 돈에서 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글을 보고 필자를 속물시 여길지 모르나 공무원, 회사원, 각종 사무원 중에 6-70%가 증권을 한다. 그런데 그 증권이 호황을 누리면 그들의 직무가 아주 활기 넘치고 용기가 백배된다. 그렇지만 이와 반대로 증권이 폭락하면 근무의욕마저 상실하고 상심하는 것이 이 세상의 풍경이다.

이제 세상은 용기지수마저 황금이 좌지우지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니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경제적 동물이라는 현대적 의미를 우선시하고 가정을 최소한의 경제안전망 안에서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 안전망이 가족 모두의 정신건강을 만들고 정신건강이 용기를 만드는 것이니 힘차고 용감하기 위해서는 가족경제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힘차고 용감한 자는 가장 가정에 충실한 지아비고 지어미인 것이다.

‘가정을 황금색 무지개가 뜨게 하라!’

가정을 천국으로 만든 자, 이 시대의 가장 힘차고 용기 있는 자다. 아내와 타협해야 할 일을 혼자 처리하는 어리석은 가장은 없는가? 아직도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진 남편은 없는가? 매사를 가족중심 아내중심으로 해결하는 家長가장이 이 시대에 가장 힘차고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만이 국민의 4대 의무를 다 이행하여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 그 행복이라는 단어가 곧 힘차고 용기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직장을 가졌을 때만 가능하다. 직장은 직업으로 통한다. 직업은 가장 위대한 종교다. 그 종교가 당신을 천국으로 극락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 직장을 위하여, 직업을 위하여 일하라! 가정이 튼튼해진다. 가정을 위하여 勇猛精進용맹정진하는 그 모습이 힘차고 용기 있는 모습이다.


-슬기롭고 성실하라.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활동한다. 쉬지 않고 꾸준히 활동하는 데서 성실성을 찾을 수 있다. 농경위주의 성실성과 수렵위주의 성실성은 크게 다를 것이다. 인류가 처음에는 수렵생활을 하다가 그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환경에 대한 적응능력이 생기므로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며 농경문화를 만들어 갔다.

농경문화는 정주생활을 가능하게 했고 정주생활은 공동체 사회를 만들었다. 이 사회의 출현은 의식주라는 3대요소를 만들어 냈다. 그 의식주가 있으므로 완전에 가까운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공동체 사회는 주거문화를 만들었다.’

취락이 형성되면서 의식주는 다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거주를 가능케 하는 데는 지혜와 성실성이 강요되었다. 집이라는 개념의 피할 자리, 은신처, 쉴 자리, 잠잘 자리, 아이들을 키울 공간이 필요하게 되므로 이곳에는 지극히 안전이 문제가 되었다. 경계심을 갖지 않고 쉴 공간이 집이다.

‘집은 곧 안전한 쉴 자리이다.’

집을 확보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뒤 따랐다. 이 집이라는 글자를 추적하여 미루어 살펴보면 집 가(家)자를 표현할 때를 예를 들 수 있다. 집을 형상화한 갓머리에 돼지시(豕)를 넣어 사람이 거주하는 집을 형상화한 것을 보면, 사람이 사는 집에는 반드시 돼지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왜? 돼지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일반 상식으로는 돼지는 부에 상징이다. 돼지꿈을 꾸면 횡재를 한다는 등 돼지는 재화와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집이 부를 상징하는 돼지와 결합하여 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을까? 아니다. 한자가 파생될 무렵 인간의 생각은 집이 재산의 필수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때 한자의 집 가家자를 만들던 시대 사람들은 집에 돼지를 결합한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이해하면 된다. 즉 인류가 정주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고충은 독충이나 독이 있는 파충류 , 전갈 따위와의 전쟁이었다. 뱀이나 지네와 같은 독물 때문에 집이 인간들에게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특히 큰비가 오거나 장마가 질 때면 이들 독물들도 사람이 사는 집과 같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데 그 때에 사람들은 아주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던 때 사람의 안전을 지켜주는 동물이 개도 아니요, 고양이도 아니고 돼지였다.

돼지는 본래 그 피부가 두꺼운 비개층으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독물의 피해를 입지 않고 그것들을 먹이로 이용하였다. 그러하므로 돼지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독충이나 파충류를 잡아먹고 때로는 몰아내는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러기에 집家자에는 돼지豕자를 넣어서 글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정주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집을 짓고 돼지를 길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집안에는 청소해서 자는 방과 먹을거리를 만드는 부엌이 생기고 불씨를 보존하는 화덕이 갖추어 지고 돼지와 함께 생활했다. 생활공간에서 불씨를 보존하고 돼지를 기른다는 것은 노력이라는 이름의 근면과 성실이 만들어 낸 결과다. 어쩜 돼지를 생활공간에 두고 불씨를 지키는 일이 삶과 직결되는 것으로 성실성이 담보된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지혜가 무한정으로 넓어지고 생산 활동이 다변화되면서 인간에게는 힘, 용기, 지혜, 성실, 도덕 같은 광범위한 제 요소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힘과 용기그리고 지혜도 있는데 성실하지 못하면 헛일이다. 사람이 성실성이 없고, 거짓되고, 나태하고 꾀를 부리면 도덕이 없는 부도덕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것은 인간으로써 그 가치를 상실한 허깨비가 되고,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성실성이란 선의 출발인가?

무망 진실성 가운데 몸에 배어서 우러나오는 생산 활동이 성실의 열매다.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기본적인 삶의 밝은 모습이다. 성실은 선을 만들어 내는 모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콩 심는데 콩이 난다는 말은 콩을 심는 지혜와 콩을 심었으니 콩을 거두겠다는 진실의 알맹이를 만드는 성실함이 그것이다. 콩을 심어두고 은행이 열리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허황된 것이고 거짓이고 슬기롭지 못한 어리석음이라할 것이다. 거짓과 진실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거짓을 말하는 僞위자는 사람과 하다라는 爲위자의 결합이다.

‘누가 거짓을 하느냐?’

짐승도 아니요. 사람만이 거짓을 한다. 거짓행위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타난다. 그래서 거짓僞위자가 생겨난 것이다. 참이라고 하는 정성성誠자는 말을 이룬다는 뜻(言과 成)이 합쳐진 글자다. 말이 행동으로 나타나 이룬다. 즉 말의 실천이 바탕이 되어 현실화 될 때의 상태가 정성성이 된다. 참을 뜻하는 誠과 같은 뜻의 진실 즉 참이라는 한자어 참진眞자를 파자해보면 匕 目 大 의 합체이다. 비수, 눈, 큰 것의 합체다. 비수는 찌르면 피가 나오고 피는 많이 흘리면 죽는다. 거짓을 참으로 위장하여 진실을 감추려할 때는 비수를 들어 찌르는 것이 참 진자의 모습이다. 거짓을 떠나 무망진실성으로 성실함으로 슬기롭게 눈을 크게 떠서 칼을 바르게 바라보라고 가르치고 있는 글자가 참眞자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땅을 본받아 살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진리(도리)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을 받는다. 즉 진리란 자연을 본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진리란 자연 그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誠者天之道也란 말이다. 참이란 하늘의 길이다. 그렇다. 성실함이 하늘의 도리다. 그러면 인간의 도리는 무엇인가? 誠之者人之道 라고 했다. 성실함 그 자체가 인간의 도리다. 슬기롭고 성실하라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자 본분이다. 복을 받을 테면 성실하라. 슬기롭고 성실하라. 비를 막아주는 움막을 짓고 한 마리의 돼지를 기르는 슬기롭고 성실함이 있어야 인간은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도리의 근본은 무엇일까? 참이요, 성실함이다. 성실이란 삶을 영위하는 활동인데 고급말로는 자기완성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자기를 완성한 사람, 자기를 완전에 가깝게 이룩한 사람. 한 올 빈틈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 자기완성의 사람이다. 이 사람의 정신을 다르게 비유하면 그 지극함이 귀신과 같다고 탄복할 것이다. 그래 생겨난 말이 지성여신이다.

‘至誠如神지성여신이란 무엇이냐?’

지성이란 지극한 성실함이다. 거짓 없이 진실한 것이다. 진짜 精髓정수의 참된 것이다. 이를 精誠정성이라한다. 이 정성이 지극하여 귀신과 같다는 말이 지성여신이다. 불교에서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깨어 기도 한다는 것이나, 증산도에서 태을주를 외우는 것이, 그 정성을 다하고 성실함을 다하는 것으로 결국은 다 같은 맥락으로 신의 마음과 한마음이 되려는 과정을 가르침이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기실 귀신의 위상을 누르는 인간의 슬기로운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이러한 일의 모든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귀신은 하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믿을 신자는 信 = 人 + 言이다. 결국 인간이 말로써 신용을 세우는 것이다. 인간이 그 말이 헛되었을 때는 僞善이 되는 것이다. 악이 된다는 말이다. 위선이란 선이 아니란 말이다. 슬기롭고 성실한 그 무망진실성과는 배치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진실의 반대말은 허위이다. 이름은 있는데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 빈 것이 허위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힘쓸 것인가? 務實力行이란 말이 있다. 이는 外華內虛의 반대되는 말이다. 무실역행은 속이 꽉 찬 알토란과 같은 것이고, 외화내허는 쭉정이를 말한다. 국가건 개인이건 무실역행할 때 발전이 있다. 외화내허 할 때는 머지않아 부도가 날 상태로 될 것이다. 부도가 나면 어떻게 되는가? 거지가 된다. 노숙자가 된다. 인격체로써 대우를 받지 못한다. 만약 나라가 그 꼴이 된다면 그것은 나라가 아니요, 하나의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머지않아 국권을 상실하고 다른 강한 나라에게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토록 슬기롭고 성실하게 산다는 것이 국가든 가정이든 사회든 흥망성쇠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는 흔하게 유비무환이란 말을 들어 왔다. 어쩜 슬기롭고 성실하자는 뜻의 전부를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또 4환이란 말을 들어 왔다. 四患이란 僞, 私, 放, 奢 위사방사를 말한다. 이를 현실에 맞게 풀어보면 허위, 사욕, 방자, 그리고 사치를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기꾼은 없는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횡령, 청탁, 낙하산, 줄 세우기 등등 집권층, 고위층이 늘 조심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자살한 대통령을 보면서 黃金黑邪心황금흑사심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傲慢放恣오만방자가 얼마나 두려운가도 깨우쳐야 할 것이다. 특히 가진 이들이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휘파람을 불고 설치는데 이런 오만방자는 공동체를 위해서 자제되어야 할 대목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치다. 상위계층 즉 귀족계층의 사치가 로마제국도 무너뜨렸다. 우리는 졸부 2세들이 벌리는 강남의 환경변화에 대하여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류층 사회의 사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1억짜리 시계며 수십억짜리 초호화 결혼식 장면도 많이 보고 듣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가감 없이 살펴보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는 진단인데 그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남과 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우리에게 슬기롭고 성실하라고 외치는 일은 그 목소리가 학교든 직장이든 사회이든 클수록 좋을 거라는 생각이다. 최소한 한국인으로 성공하려면 ‘성실’이라는 글자 두자를 가슴에 새기고 오늘도 내일도 務實力行하여야 할 것이다.
  

-꾸준히 공부하라.

6.25 사변 통에 터전의 전부를 이북에 두고 남하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돈이 될 금붙이나 보물을 몸에 지니고 온이도 있으나 대부분 빈 몸으로 나왔다. 목숨 하나 살리려고 버둥대며 나온 것이다. 이들이 남하하여 살아온 지 60여년! 한 평생이요, 두 세대가 지냈으니 긴긴 세월이다. 참으로 누군가에게 화풀이라도 해 보았으면 매인 속이 트일 것 같은 울분의 세월이다.

그런데 이들이 남하하여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만들고 가문을 만들면서 힘이 되었던 것이 무엇 이었을까? 답은 건강과 지식이었다고 한다. 고향을 버리고 객지로 나온 타국 같은 남한의 생활 속에서 힘이 된 것은 건강과 지식이었다.

평양의전을 나온 의사자격증은 도둑도 맞지 않았다. 녹슬지도 않았다. 평양사범을 나온 교사자격증은 군대도 면제해 주었다. 제자를 만들어 주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한다. 공부라는 것, 지식이라는 것. 이것은 무한자본이고 재산이다. 도둑이 빼앗아 가지도 못할 보물이다. 이 공부를 우리 선조들은 그 중요성을 알았기에 먹고 사는 데 불편하드라도 후손을 위한 교육에는 앞뒤를 갈리지 않고 투자를 했다. 이 교육열이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세계로 우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5-60개의 나라가 있다. 나일강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하다. 드넓은 국토, 비옥한 토양 그리고 무한 지하자원이 그 곳에는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선조들은 놀고먹고, 눈치보고, 종교싸움질이나 하고, 방탕한 생활이 그들의 문화였다. 그러다보니 아프리카의 일 년 총생산액이 대한민국의 국민총생산액보다 못한 적은 재화로서 가난 속에서, 질곡 속에서, 질병 속에서 전쟁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교육과 비교육의 차이’

교육할 줄 모르는 조상들이 남겨준 유산은 가난과 나태와 질병과 유흥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맹모삼천지교라는 우수한 교육문화를 가지고 그 맹모를 우러러 볼 줄 안 우리는 세계를 리더 할 수 있는 대한민국으로 변한 것이다. 이 위대한 교육의 힘이 식민사관을 뿌리 뽑고, 사대주의도 배제하고, 절대빈곤도 몰아내어 도움 받던 나라에서 도와주는 나라로 우뚝 선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문맹 0%의 나라가 되었다.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해도 읽을 줄 아는 국민으로 변했다. 오대양 육대주에 대한민국의 깃발은 이북을 제외하고는 휘날리고 있다. 사막과 정글에서 호젓한 섬나라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어를 배우는 세상이 되었다. 이 모두가 다 꾸준히 가르치고 공부했기에 나타난 소중한 결과이다.

이제 조기교육과 평생교육, 보통일반교육과 영재교육을 아울러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열들이 원하고 바라는 민족문화의 진흥에는 퇴보한 부분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구당 김남수 옹이 90노구를 이끌고 외친 경험의학의 자유화가 그것 이다. 민족의학 경험의학을 강압적으로 서구문화의 틀 속에 빠뜨린 것은 크게 문제가 있다. 누구나 위생상식만 철저하다면 생활하면서 용이하게 쓸 수 있는 침. 뜸의 자유화 문제이다. 양의학이나 한의학을 공부한 의사만의 전유물이 된 침. 뜸의 문제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조상이 일러준 대로 침을 놓고 뜸을 뜨는 일에 6년 이상 공부하여 자격증을 갖추어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아주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간병행위를 그들의 전유물로 하여 장사 속으로 묶어 놓은 일은 민족문화창달에 역행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침은 고조선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다 사용했다. 뜸은 침을 보조하는 부수적인 간병행위일 뿐이다. 이런 것은 그냥 어깨를 주물러 주고 팔다리를 만져 주는 일과 별로 차이가 없는데 군정 당시 급조된 의료법으로 묶어서 학문시하고 금기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록에 보면 딸이 시집 갈 때, 슬기로운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전수 받은 몇 가지 침놓는 법을 딸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바늘을 주어 복상사를 예방하는 법과 사관을 터서 급체를 내리고, 오한을 덜고, 경기를 막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고려청자 빛의 오묘함을 전승 받지 못한 것처럼 사라졌다. 민간의학을 억제하는 의료법이 민간의료 경험의료인 소위 고방의료이나 조방의료를 다 막아 놓았다. 그것은 곧 평생공부의 길을 막아 놓은 것과 진배없다.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시장경제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보니 이것이 자유롭게 지식을 얻어서 밝은 세상을 보자는 것 아닌가. 자유롭게 정보를 얻어서 다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아닌가. 어떤 정보든지 어떤 특권층만이 가질 것이 아니라 모든 막혔던 물고를 확 터서 경쟁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옛날 봉건시대에 王侯將相이 有種乎? 냐고 하여서 대단한 저항운동이 있어 마침내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을 보면 의사도 종자가 있고, 약사도 종자가 있고, 법관도 종자가 있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정규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어떠한 면허증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병의원에서 조수로 근무하던 학구파가 의사고시를 통과하여 의사가 되었다. 무학자도 변호사나 법관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학교라는 종자틀을 만들어 독식해 버리게 법을 만들었다. 한방약사, 침사, 구사, 물리치료사, 조무사, 안경사, 인공수정사, 등등 얼마든지 학교가 아니라도 학문과 기술을 습득하여 국가고시를 통과할 수 있다.

그런 중요한 것들을 다 막아 놓고 평생 공부를 하라고 하면 소설가나 시인, 시나라오, 희곡 작가나 되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이나 시인도 문단정치라는 파당이 있어서 독학으로는 문단을 나가기가 쉽지 않다. 설혹 문단에 데뷔 했다 할지라도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데 한계가 있다.

하여서 평생교육이나 평생공부를 할 수 있는 광장이 필요하다. 어떠한 분야든 공부만 하면 성취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전면적인 문호개방이 절실하다. 재야에서 꾸준히 공부하고 그 공부가 성취된 이가 공부라는 과실을 따 먹을 수 있는 광장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대한민국은 사장되어 있는 두뇌와 사장되어가는 두뇌를 수용하여 증산 강일순 대선사가 일찍이 주창한 세계에서 일등국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4. 도덕산업과 음식문화 창출

도덕이 산업이 될 수 있는가? 독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그러나 도덕이 아주 대단히 큰 산업이 될 수 있다는 필자의 주장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종교에 대한 산업을 물어 본다. 종교가 산업이냐? 사업이냐? 아니냐? 이에 대한 답은 세 개가 다 정답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다를 수도 있으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종교는 산업이고 사업이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을 도와준다거나 도덕이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는 산업이나 사업을 정의할 때 이것은 이윤이 창출되느냐? 아니 되느냐? 라고 따질 수 있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이 업에 종사하여 밥을 먹고 돈이 되느냐? 아니 되느냐? 라는 말로 속되게 물을 수 있다는 말이다. 속되게 물었으니 속되게 대답하자. 그 답은 예스이다. 돈이 되고 밥도 먹을 수 있는 산업이고 사업이 종교이다. 그렇다면 도덕도 돈이 되느냐? 아니 되느냐? 고 물으면 된다는 답이 아주 정확 명료한 답이 된다.

참 쉽게 답이 나와서 좋다. 그렇다면 도덕이 산업이 될 수 있다는 답을 얻었음을 독자 여러분도 다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도덕이 종교보다 이윤 창출에 더 큰 유리성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종교에는 교주가 있어서 돈을 벌면 번대로 바치라고 하지만, 도덕은 그런 교주가 없어서 번대로 그것이 다 이윤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도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걸쳐서 머리와 꼬리를 따라 다니면서 감시 감독을 하는 양심의 채찍으로 서 있기 때문에 종파도 따지지 않고 경전도 해석이 복잡하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이 위대한 무한 산업을 산업 또는 사업화하여 우리나라를 도덕 생산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투명성 있게 가공하고 포장하여 각 가정에도 배달하고 사회 일원에도 유포시켜서 이 나라를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 시키자는 것이다.

도덕이 말라 죽은 사회, 도덕을 피하고 멀리하는 사회, 도덕에 무감각적인 사회로 된 나라는 미래가 없다. 20대 청년과 60대 노년이 겨루고 싸우는 동물의 왕국은 그 장래가 없는 것이다. 대통령과 장.차관과 같이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성경 몇 구절에 의지하여‘ 불경의 어느 한권의 책에 의지하여 그 도덕성이 마비된 사회는, 그 국가는 더 이상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국가는 종교보다 훨씬 더 당신을 보호하고 죽은 후에도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준다.’

국가가 종교보다 소중하다는 말이다. 한국인은 이러한 자아의식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종교와 그것의 종파로 사회까지 분열되는 비극은 없어져야 한다. 도덕 앞에 부끄럽지 않은 양심의 소리에 충실한 산업이 크게 일어나야 한다. 그 산업을 통하여 종교처럼 돈을 버는, 부를 축적하는 사업가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종교라는 이름을 걸고 돈을 요구하는 타락한 세태는 단연코 몰아내어야 한다. 신을 팔아먹는 사이비종교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대명천지에 귀신 운운하여 혹세무민하는 거짓 선지자는 다 몰아내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몸에 자신이 주인이 되는 도덕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도덕의 책무고 국가의 책무이다. 종교는 자유지만 거짓종교를 묵인하는 공권력도 직무유기다.

하여서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고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재무장운동이 환경운동보다 더 선행하여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도덕은 세계시장에 내어 놓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상품이어야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러분! 당신은 도덕코리아 상품입니다.’

이제 정신을 먹이고 살리는 도덕을 이야기 했으니 육체를 먹여 살리는 음식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남았다. 우리는 본래 농경문화를 꽃피워 왔으니 육식문화가 아닌 채식위주의 문화에서 살았다. 그 반증으로 제사문화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자. 제사라는 祭제자를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祭자는 肉, 手, 示의 합자로 제사를 지낸다는 뜻인데, 이 속말(內意)은 짐승을 잡아서 상에 차리고 기도한다는 뜻이다. 왜 하필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일까? 이는 채식위주의 문화이기 때문에 특별히 신께 또는 하늘에 謝肉사육을 하는 것이다. 짐승의 고기를 바치는 것이 제사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음식문화는 특별히 제사를 지내는 형식을 떠난 음식문화는 채식문화인 것이다. 생선이나 쌀. 보리 그리고 소채 등을 발효시켜서 먹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유전형질을 가진 우리 몸인데, 경제력이 좋아지고 고기값이 싸지니, 쉽게 많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어 문제가 발생하였다.

몸에 탈이 난 것이다. 정신에도 탈이 붙은 것이다. 절제하여 가려먹어야 건강한 것인데 그 틀이 깨어진 것이다. 그 틀이 깨어지니 몸도 정신도 다 망가졌다. 이 먹을거리 문화에 대한 깊은 반성과 이해가 촉구되는 바이다.

특히 반찬이 상업화 되다보니 가지 수효가 다양화해졌다. 냉동. 냉장식품의 개발은 더 많은 반찬을 양산하였다. 그런데다가 튀김음식이 활성화되어 진한 음식을 많이 섭생하게 되었다. 이 음식들은 거의 대부분 수렵민족의 것으로 입맛을 참으로 감칠 맛나게 유혹하며 과식하면 발병을 부채질 하는 것이다.

‘누가 이 수렵민족의 음식을 덜 먹도록 막을 것인가!’

내일 죽더라도 누구나 다 좋은 음식 많이 먹겠단다.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단다. 빈부를 떠나서 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상식이다. 값비싼 뷔페나 고급반찬을 먹는 것이 신분 상승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까지 되었다. 하여서 쓸데없는 헤세를 부리느라고 더 반찬수효가 늘어나 국력이 소진될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음식은 한약재를 2-30 여 가지를 넣고 쏘스를 만들기도 한다. 쏘스라는 이름의 국물은 모두 육고기를 우려낸 진국이 대부분이다. 이러하니 이것은 음식인지, 잡탕인지 기름 덩어리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런 다양한 음식문화는 음식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음식의 개발은 국력을 소진시키는 일밖에 달리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반찬수효가 많다 보니 먹는 것 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은 허영덩어리 음식문화를 낳았다. 그런데다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몸이 원하는 음식이 아닌 진한 음식 즉 육고기가 많이 포함된 음식을 자주 먹다보니 비만은 물론 당뇨병, 고혈압, 암, 뇌졸중을 앓게 되었다. 이런 현실을 액면대로 말한다면 음식문화의 갑작스런 변화로 음식 버리고 몸 망치는 음식문화가 된 것이다.

‘맛만 보고 버리기 경쟁을 하는 음식점들’

비싸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야 체면이 서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이 3-40가지의 반찬에 쌀밥 한 공기 찌개를 먹는다면 미처 손대지 못한 음식은 몇 가지일까? 이 밥상에 한 차례 오른 음식은 버릴 것인가? 다시 다른 사람의 밥상에 올릴 것인가? 이것이 아주 큰 골칫거리고 문제가 되었다.

이러하니 우리 음식 문화는 이제 적극적인 간섭이 필요하게 되었다. 값을 매기는 방법도 과학적으로 찾아야 한다. 위생문제도 철저하게 법으로 정하여 단속하여야 한다. 이를 방관하는 정부는 어쩜 未畢的故意미필적고의 라는 죄를 짓고도 방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제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우리 음식을 세계화하여 빠른 시일 내에 고유한 브랜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식단은 그 컨셉은 모든 국민의 건강을 해치지 않고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너무나 비경제적이고, 비위생적이며, 비환경적이고, 비합리적인 음식문화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국민합의를 도출하여 식당마다 음식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반드시 사람이 먹어 소비하는 음식문화의 정착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이대로 방치하면 국토의 오염을 재촉하고 같은 반찬이 몇 번이고 음식상에 올라가서 국민건강과 정서를 해치게 된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것이다.

하여서 만든 음식은 다 먹어야 하고, 버리는 음식을 절대로 없게 하여 환경을 지키고 국민건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음식문화의 바른 길이라 믿는다.

이 일들이 모두 제 길로 가기위해서는 모든 주방을 투명성 있게 개방하여야 한다. 그 개방방법은 카메라의 간섭이 불가피하다할 것이다. 이제 식품위생법에 주방을 개방하는 카메라 설치가 필수적인 시대라 할 것이다. 알아보고, 살펴보고, 확인하고 청정한 음식을 버리지 않고 다 먹는 음식문화 창출이 요청되는 것이다.


맺는 말

우리 대한민국인은 지금 대단히 중대한 岐路기로에 서 있다. 어디로 방향의 키를 잡을 것이냐? 이것이 참으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가 대단히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기로의 시간이요, 불확실의 세풍이기에 그렇다. 여기서 世風세풍은 歲時風俗이 아니라 인간이 살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방향성 즉 바람을 말한다.

참으로 얼토당토 않는 주의와 주장이 난무하는 시간이요, 바람이다. 대의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광장민주주의, 토론민주주의, 촛불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촛불의 긴긴 바람을 보면서 인터넷의 거친 언어 문자를 보면서 미래에 대한 방향타를 잡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시적인 바람일 것이다. 생업보다. 바람업(데모성 군중업)을 일삼는 사람들도 바람을 버리고 생업에 매진할 날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도 금요일의 저녁을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다. 우리는 지금 토요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금요일을 기다린다. 이틀이라는 주말을 즐겨야 하니까. 2일의 주말을 즐기게 된 바탕에는 우리들이 지난날 그토록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창의성을 가지고 참고 견디며 일했기에 금요일이 즐거운 나라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바람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금요일을 기다리지 못한다. 그들은 불평불만을 가슴에 품고 헤매다가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사회 안전망 밖에 있기에 그렇다. 부정사관을 가지고 형식을 주장하며 살기 때문에 그렇다. 등골에서 뼈가 부딪쳐서 만들어 내는 땀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렇다. 바람업이란 오직 오기와 독기와 독선을 행하며 입만 가지고 나불거리며 시간을 불태운 사람들이다. 비도덕적인 사람들이다. 먹을거리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화평과 안식의 시간을 만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참다운 민주주의 나라, 땀 흘리는 자가 잘사는 복지국가가 아니다. 이미 이룩된 선거민주주의의 정착과 의회민주주의의 성공을 부정한 사람이다. 자신의 나태와 태만은 책하지 않고 자신의 불평불만을 합리화시키려 바람 같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이다. 안정보다 혼란을 좋아하는 부류는 어떤 사회에서도 대우 받지 못한다. 자기주장을 자제하고, 참고 견디며,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맨 뒷줄에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세상을 관조하여도 보고 행동하는 선민, 일하는 국민, 말없는 근로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진 이가 나라의 보배다. 그런 묵묵히 법과 질서를 지키는 한강수처럼 큰 물줄기가 이 나라의 여론을 이끌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대국이 되려면,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려면 이렇게 국민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국민의 바탕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끈기와 인내와 양보와 슬기와 화합과 명랑하고 솔직함과 열성적으로 배우려는 꾸준한 국민성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배타적인 성격을 바꾸어라. 부정적인 눈을 바꾸어라. 반역의 마음을 바꾸어라. 시기심을 버려라. 솔직하여라. 정직하여라. 양보하여라. 깊이 생각하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심정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밝은 국민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가. 타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국방을 이룩해야 한다.
나. 세계에서 추종을 불허하는 브랜디 상품개발이 필요하다. 최소한 10 개 이상 상품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면, 조선, 철강, IT, 자동차산업 등등과 같은 상품 개발이 필요하다.
다. 도덕적으로 성숙한 정의 사회 음식을 먹고 잔반이 남지 않은 음식문화의 정착과 한식의 세계화가 이룩되어야 한다.
라. 자유민주주의 신봉과 시장경제가 완전히 정착된 나라가 되어야 한다.
마. 지방정부가 책임지는 복지사회 건설 - 국가 균형발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바. 대한민국이 성공하여 만든 통일이 필요하다.
사. 고도로 진화된 교육국가 건설- 지방정부가 중심이 된 교육 100%의무교육을 실시하되 적성중심, 직업중심, 영재중심교육으로 재편하여야 한다. 사회가 서로 합의하여 영재를 크게 발굴하고 영재를 영재답게 교육하므로 영재가 산업을 이끄는 사회 구현. 영재가 나라를 살리고 만인을 살린다는 영재교육에 인색하지 않은 국민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교육정책이 간절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는 수박통 보다 작지만 그 머리로 세상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내었다. 神까지도 만들어 낸 인간이다. 이 인간을 일깨우는 일에 우리는 인색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귀신도 잡아와 단련시킬 수 있는 인간임을 서로 인정하고 인간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거리를 누비며 극락. 천당을 외치는 불민한 인간들이 이 나라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투철하고 투명한 객관성 있는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이제 태평양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세안이 힘을 쓰는 신 아세아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아세아시대에 황해권시대는 바로 하늘이 준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원시반본의 그 가치를 읽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동이민족이 세계를 이끌어 갈 시간인 것이다. 마카오에서 홍콩과 상해를 거쳐 산동 반도와 황해 그리고 목포, 당진, 인천이 세계의 맥박을 만들어 내는 중심이 될 것이다. 런던시대가 지나고, 맨하탄 시대도 지나가고, 인천과 상하이 시대가 약속되어 현실로 나타날 시간이다. 이 위대한 지구의 시간 앞에서 대한민국이 추호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이 소중한 시간을 맞이하여 한국인은 보다 긍지를 가지고 새 역사와 새 세상의 주인이 될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서로 참고 견디어 화합하고 슬기롭고 참되고, 명랑하고 씩씩하게 일하고 공부하여 도덕적으로 드높고 물질적으로 풍요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될 때에 한국인은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고 세계를 주무르는 주역이 될 것이다. 그 날을 꿈꾸며 한국인의 체질을 도덕적으로 개선하여 도덕을 바탕에 두고 일어선 대한민국을 만들자. 도덕이 가장 큰 산업임을 온 천하에 선포하자.

※ 편집자주 : 외부 필자의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브레이크뉴스>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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