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心山 雲 武藝 敎範 ](초안) 1

조회 수 9339 추천 수 0 2011.03.06 03:57:36

   [ 心山 雲 武藝 敎範 ](초안)
 

 

 

 

< 목차 >


[1]. 의성김씨의 소개

[2]. 심산(心山)김창숙[金昌淑]옹의 생애

[3].심산(心山) 수련관의 설립
1) 설립목적 
2) 명칭
3) 위치
4) 규모
5) 시설
6) 회원수송

[4].心山 雲 武藝 협회의 구성
1)협회 구성의 원칙
2)협회 구성원의 자격
3)협회 조직도

[5]. 心 山 체육관의 운영
1)규모
2)시설
3)무예
4)수련복
 가)도복
   나)도복띠
     다)마크
      라)모자
        마)신발
5). 지도자의 자격과 특성
 가)자격
  나)특성
6). 체급
 가)체급의 분류(kg)
  나)도표

[6]. 心山 雲 무예(武藝)의 수련과정
< 선행학습 >
1)무예(武藝)의 정의  
2)해부학
 가)인체의 골격
  나)인체의 관절
    다)각 관절의 정상 운동범위
     라)인체의 근육
       마)골격 및 관절과 근육의 구조와 기능
         바)인체의 혈관구조와 기능
           사)인체의 경락(經絡)
3)인체 드로잉

< 心山 雲 武藝 수련과정 >
1).단전호흡 
2).명상 + 명상음악
3).준비운동
 가)체조
  나)스트레칭
4).근육강화,재활치료 운동
 가)웨이트 트레이닝
5).무예(武藝)
 가)(手指)술 : 手指법
  나)타격기 : 복싱,태권도,종합격투기
   다)잡기술 : 레슬링,유도,씨름, 주지수
    라)혼합무술 : 우슈,합기도
6).병기술
 가)곤봉술
  나)단봉술
   다)검도술
    라)창술
     마)단검,투검술
      바)전기 충격기술
       사)궁도
        아)양궁
          자)사격술
7).경호술
8).스포츠
 가)마라톤
  나)사이클
   다)클라이밍
    라)수영
     마)스키
      바)스포츠심리학
9).응급처치
 가)심페소생술
  나)골절,탈구
   다)스포츠상해와 마사지
    라)독(毒)에대한 이해
10).힘
 가)물리학적힘
  나)육체적힘
   다)정신적힘
    라)참고
11).참고
 가)태극
  나)괘
   다)팔괘
    라)육십사괘
     마)음양오행
      바)주역
       사)보법
        아)손자병법

[7].心山 학습
1)아동 영양학
2)컴퓨터
 가)컴퓨터의 이해
  나)컴퓨터자격증(정보처리 기능사)
3)운전면허
4)소방학
5)가례백과(家禮百科)관혼상제
  가)관
   나)혼
    다)상
     라)제
      마)참고 
6)서예
7)외국어
                
[8].논문
1)논문작성법
2)소 논문작성법
3)레포트 작성법

[9].심사
1)승급심사
2)승단심사

[10].참조

 

 

 

 

 

                                                      의성김씨의 소개

 

 

 


의성 김씨 (義城金氏)는
 
1> 시조 : 김 석[金錫]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의성(義城)은 경북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에 소문국이었다. 그후 신라때 문소로
개칭되었다가 고려초에 의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 김 석(金錫)이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의성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에는 김 석(金 錫)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조선씨족통보]·[동국만성보] 등의 문헌과 [신라김씨분파연원도]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의성김씨는 8세손 공우(公瑀)의 아들대에서크게 번창하였는데, 장자인 용비(龍庇)가 태자첨를
지냈고, 차자 용필(龍弼)은 수사공을 ,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외 인물로는 찬성사를 지낸 훤(暄)과 우왕때 도순문사 광부(光富)가 유명했 고, 공조전서를
지내고 삼국사기의 발문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 거익(居翼), 추밀원부 춘(椿),
평장사 연(衍) 등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옥(玉)의 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와 대사간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태종때 추충분의좌명공신에 올랐다
조선 중기에서 의성김씨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의
형제를 들수있다. 안국(安國)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로 나가 각 향교에 소학을 권장하고
[벽온방]·[창진방(瘡疹方)] 등을 간인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국문학을 비롯한 성리학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조광조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와 병조의 판서를 거쳐 대사헌,·대제학,·
좌찬성 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선습]·[모재가훈]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안국의 아우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이조정랑을 거쳐 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병조,·예조,·형조 의 참판을 지낸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성리대전절요]를 비롯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한말에 와서는 영수(永銖)가 장기군수 겸 병마절제사에 재임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고, 철종때 [북천가]를 지은 진형(鎭衡)과 예조참판 굉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집성촌으로는
경북 의성군 단촌면 상화동, 관덕동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경북 의성군 사곡면 화전동 충북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 일직면 구미동 평남 용강군 오신면 구룡리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등이다

 

 

 

                                              심산(心山)김창숙[金昌淑]옹의 생애

 

 

 

심산(心山)김창숙[金昌淑]옹은
 
1879(고종 16)~1962.

독립운동가·유학자·교육자.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로 8·15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출신 및 한말의 활동]
 
김창숙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翁). 한때 우(愚)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種錫)·이승희(李承熙)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 請斬五賊疏〉를 올렸다. 1908년 대한협회가 설립되자 고향인 성주에 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했다. 1909년에는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했다. 같은 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주장 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보냈다.
 
[일제강점기의 항일투쟁]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한동안 칩거하며 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다져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7명의 연명으로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국내의 향교에 배포하고, 이를 갖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김규식을 통해 파리 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했다. 이 사건으로 곽종석 등 수백 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유림단사건'이다.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교통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파쟁을 조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쑨원[孫文]을 비롯하여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여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주선했다. 한편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1920년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사민일보 四民日報〉를 발간하여 그중 일부를 국내로 우송했으며, 신채호(申采浩)를 도와 베이징[北京]에서 잡지 〈천고 天鼓〉를 발행했다. 1921년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하자, 이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신채호 등과 연명으로 발표했다. 그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4년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교섭, 만주와 몽고 접경지의 황무지를 조차·개간하여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8월 국내에 잠입, 모금활동을 폈으나 기대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모금활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계 인사가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제2차유림단사건'이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청년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여 친일파와 일제의 통치기관을 박멸하기로 결정하고, 나석주(羅錫疇)로 하여금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게 했다. 1927년 상하이[上海] 공공조계(公共租界)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4년 9월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출옥한 뒤에도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다. 1945년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어 왜관경찰서에 다시금 구금되었으나, 일제패망으로 석방되었다.
 
[해방 후의 활동]

해방 이후 일반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활동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인민공화국 반대와 임시정부 지지, 신탁통치 반대 등 우익 정객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한민당 및 이승만 계열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다. 비상국민회의 8인 특별위원을 거쳐 1946년 2월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부수립을 위한 모체가 아니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일 뿐이라 하여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이 해 봄 해방 이후 난립한 유림단체의 통합에 힘써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결성했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일제 때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어 친일파 유림이 득세했던 성균관을 정비하는 등 유림의 재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했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隣會)의 토지재산을 기부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그해 9월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학교설립 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1948년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8월 단독정부가 수립된 뒤로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1년 이승만에게 하야경고문을 냈다가 투옥되었으며, 이듬해 부산 정치파동 때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이승만정권과 투쟁했다. 1953년 2월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1955년 재단분규로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 죽었다. 그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서에 〈심산만초〉·〈벽옹만초〉 등이 있으며, 〈벽옹칠십삼년회상기〉 초고를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여 〈심산유고 心山遺稿〉로 간행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 대구형무소 옥중투쟁에서 (1928년) -
 
▲ 심산 김창숙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항일투쟁과 반독재 투쟁에 평생을 바쳤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국망(國亡)에 무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한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였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순종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閔泳璘)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때 일제는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지배층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김창숙은 <자서전-벽옹(?翁·앉은뱅이 노인) 73년 회상기>에서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은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1879년 음력 7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김창숙은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의 13대 종손으로서 유림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은 대유(大儒)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고종은 아무런 회답이 없었고 김창숙은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 뒤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의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김창숙은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며 처벌을 주장하는 건의문을 중추원에 보냈다. 성주 주둔 일본 헌병분견대 소장 노전(盧田彌之介)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곧 반역이 아닌가?”라며 건의문 취소를 요구하자, 김창숙은 “사직(社稷·나라)이 임금보다 중한지라, 난명(亂命·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충성하는 길이다”라고 답한다.

단재와 함께 친일파의 집을 털다

나라가 끝내 멸망하자 김창숙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황하다가 ‘선세(先世)의 유업’을 망치겠다는 모친의 꾸짖음을 듣고 경서(經書)에 매진했다. 김창숙은 <자서전>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성의정심(誠意正心)·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가 모두 여기서 벗어나 딴 데 구할 것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유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선비 김창숙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창숙은 1919년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김창숙은 곽종석(郭鍾錫) 등 전국의 유림 130여 명을 규합해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 ‘파리장서사건’, 즉 ‘제1차 유림단사건’을 주도했다. 한국의 유림이 역사 앞에 겨우 체면치레를 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21년 2월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우당 이회영(李會榮), 단재 신채호(申采浩)와 의기투합한다. 우당과 단재는 아나키스트인데, 아나키스트와 유림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비타협적 항일 의지로 이루어진다. 김창숙은 아나키스트들과 국내 친일파 자금이 흘러든 북경 모아호동 고명복의 집을 털기도 했다.

“모아호동은 귀족들이 사는 곳으로 경비가 철통같아 일을 끝내려면 치밀한 사전계획이 필요했다. …김창숙이 앞장을 섰고 이을규·이정규·백정기가 그 집으로 잠입하여 값진 물건을 빼내어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 모아호동 사건은 각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다. 교포는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모두 깜짝 놀랐다. 전 수사진이 동원되어 범인 체포에 나섰다.”(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독립을 위한 실천에는 주저하지 않는 선비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김창숙은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하기도 했다. 북경 정부의 임시집정 단기서(段祺瑞)의 비서였던 김달하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가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비워놓았다고 회유하자 김창숙은 “네가 나를 경제적으로 곤란하다고 매수하려 드는구나. 사람들이 너를 밀정이라 해도 뜬소문으로 여겨 믿지 않았더니 지금 비로소 헛말이 아닌 줄 알았다”라며 이회영과 상의해 제거를 논의했고, 의열단 유자명(柳子明)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1925년 3월 다물단(多勿團)과 합작해 김달하를 제거한 것이다.

김달하를 처단한 직후 김창숙은 국내로 잠입했다. 김창숙은 이회영과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북경 정부의 전 외교총장 서겸(徐謙)을 통해 북경 정부의 실권자 풍옥상(馮玉祥)과 교섭해 내몽골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 3만여 정보(町步)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이회영은 이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은 1925년 8월 북경을 떠나 서울로 잠입했다. 서울에서 정수기 등과 비밀결사 ‘신건동맹단’을 조직하고는 직접 영남으로 내려가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뒤여서 반응이 신통치 않자 김창숙은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 김창숙이 우당 이회영과 자주 어울렸던 베이징 후고루원 마을. 그는 아나키스트들과 친일파의 집을 털고 밀정을 처단하기도 했다. (사진/ 권태균)
 
“내가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것은 나라 사람들이 호응해줄 것을 진심으로 기대했던 것이오. 전후 8개월 동안 겪고 보니 육군(六軍·천자의 군대, 많은 숫자의 군사라는 뜻)이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고 방금 왜경이 사방으로 깔려 수사한다니 일은 이미 낭패되었소. …내가 지금 가지고 나가는 자금으로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거론하기도 만 번 어려울 것이니… 이 돈을 의열단 결사대의 손에 직접 넘겨주어 왜정 각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여 우리 국민들의 기운을 고무시킬 작정이요….”(<자서전>)

일부 자금만을 확보한 김창숙은 1926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다시 상해로 향했다. 그가 출국한 뒤 국내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수백 명의 전국 유림들이 검거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한다. 상해에서 김창숙은 유자명에게 청년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는 문제를 상의했는데, 유자명은 자서전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 김창숙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고향에 가서 친구들에게 돈을 모아가지고 왔는데, 이 돈으로 폭탄과 권총을 사서 적인(敵人)들과 투쟁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석주(羅錫疇)는 그때 천진에 있었는데, 나는 김 선생과 폭탄과 권총 한 개를 사서 상해에서 배를 타고 천진에 가서 나석주를 만나 서로 상의한 결과 나석주는 자신이 행동하겠다고 말했다.(유자명, <한 혁명자의 회억록>)

일제의 고문, 웃으며 받다

1926년 세모를 물들였던 나석주 의사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馬中德)으로 변장해 입국한 나석주는 1926년 12월28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경기도 경찰부 전전(田畑唯次) 경부보와 동양척식회사 토지개량부 대삼(大森太四郞) 차석 등 3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떨어지자 교전(交戰) 중 자결했다.

1926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임된 김창숙은 유자명에 의해 의열단 고문으로도 추대된다. 그러나 그해 12월 지병인 치질이 재발해 들것에 실려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에 있는 영국인 경영의 공제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 2월에 재수술을 받고 가료를 하던 중 일본 영사관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장기(長崎·나가사키)와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거쳐 입국한 김창숙은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형구를 야단스레 벌려놓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나는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종이와 붓을 달라 하여 시 일절을 써주었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磊落·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자서전>)

이때 변호사 김완섭(金完燮)이 변호를 자청하며 거듭 만나자고 요청하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군은 무슨 말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김완섭이 ‘입회한 간수의 기록이 필시 조서에 들어가 앞으로 재판에 크게 불리할 것’이라고 염려하자, “나는 일찍이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군은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초연했다.

▲ 김창숙의 생가. 그는 말년에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사진/ 권태균)
 
1928년 14년형을 선고받은 김창숙은 대전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자서전>에서 “나는 고문을 받은 이래 병이 더욱 악화되어 두 다리의 마비로 진작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일어날 때 남의 부측을 받아야 했다”고 쓰고 있다. 대구경찰서에서 받은 고문 때문에 불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창숙은 1933년 신임 전옥(典獄·간수장) 궁기(宮崎)가 절을 할 것을 종용하자 “감옥 생활 6, 7년 동안 옥리에게 머리 숙여본 적 없다”면서, “내가 너희를 대하여 절을 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라고 거부했다. 이 시절 김창숙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서 고초를 겪었다. 장남 환기(煥基)는 1927년 고문사했으며, 차남 찬기(燦基)도 투옥되었는데, 아들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김창숙은, “네가 옥에 갇힌 지 벌써 이태가 지났구나… 너의 허약한 체질로 몇 년씩 고문을 받아왔으니 결국 큰 병에 걸린 것이 당연하겠구나. 비록 그렇긴 하나 네 애비가 8년의 옥고를 치르고 큰 병에 걸리고도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네가 생각하라… 때로 <소학> <논어> <맹자> 등 마음을 다스리는 데 절실한 책을 읽고 생각해라”라는 편지를 보냈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성명 발표

김창숙은 여러 번 와병으로 사경을 헤맸으나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1934년 9월에 위중하자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는데, 이때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45년 8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 남한 책임자로 피선되었다는 혐의로 성주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옥문을 나섰다.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해방 정국은 김창숙에게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해방 뒤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서는 한편 난립된 전국 유림을 유도회(儒道會) 총본부로 통합하고 위원장에 올랐다. 그리고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굳어지자 1948년 3월 김창숙은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와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임시로 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 정부 또는 양 국가를 형성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2년 뒤에 벌어질 6·25 전쟁의 참화를 정확히 예견한 성명서였다. 그 2년 뒤 김창숙은 서울에서 6·25를 겪었다.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이 지지를 종용하자 단칼에 거절한다.

집 한 칸 없이 세상 떠난 통일운동가

1951년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했는데, 그해 봄 이승만 ‘하야경고문’을 발표했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필두로 반이승만 투쟁에 나섰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미 미 군정 산하 민주의원 회의석상에서 이승만에게 “당신은 오늘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소?”라고 성토했다고 전하고 있다. 1952년 이승만이 당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들고 나오자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려다가 괴청년들의 습격으로 모시 두루마기가 피투성이가 되는 테러를 당하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의 급서로 이승만이 당선되자 “이제 전국의 민심은 각하에게서 이탈되었다”라면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대통령 3선 취임에 일언을 진(進)함’이란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반이승만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김창숙을 모든 자리에서 쫓아내는 공작으로 맞섰다. 교육부는 1956년 ‘김창숙 명의’로는 신입생 모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냈고, 그는 결국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에는 성균관장,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958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운동에 나서고 81살 때인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에 나서면서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 서한을 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그는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84살 때인 1962년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는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역사의 임무를 전해준다.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김창숙(金昌淑)
 
  1879.7.10~1962.5.10
 
  경북 성주
 
  임시정부
 
  대한민국장(62)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峰洞)에서 김호림(金頀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창숙이지만 우(愚)라고 개명한 일도 있다. 자(字)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이지만 일제에 피수(被囚)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앉은뱅이가 되어 벽옹( 翁)이란 별호(別號)도 붙었다. 성품이 곧아서 평생을 불의·부정·불법과 타협하는 일이 없었으며 누구에게나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규탄을 서슴지 않았다.
심산은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 등으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리설(主理說)도 전수 받았다. 이러한 성장 과정으로 인하여 심산은 일찍부터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서구근대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개화(開化)와 외국의 것으로부터 내 것을 고수하자는 척사(斥邪)가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지게 되고 동시에 외세(外勢)와 저항이라는 사회변혁 속에서 전통적 유학자의 길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지킬 수 있는 구국부민(救國扶民)으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심산의 항일독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5적소(請斬五賊疏)라는 을사5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 즉시 그는 이승희와 함께 시베리아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노모를 두고 떠날 수 없다는 효심(孝心) 때문에 중단하고 계속 국내에서의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의 빚을 갚고 자립경제를 함으로써 일본을 물리치자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그는 이 일에 앞장서서 활동하였으며,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성주지부(星州支部)를 결성하여 총무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유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향리에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민족주의교육을 하였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韓日合倂論)을 제기하자 심산은 고향인 성주에서 유림들을 모아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건의서를 연서(連署)로 작성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각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경(日警)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마침내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자 나라를 잃었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오로지 성리학만을 공부하였다. 그의 학문적 실력은 이때 닦아졌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2월에 총총히 상경하여 민족대표에 유림계(儒林界)가 빠진 것을 통분하며 거족적인 민족운동에 유림계도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하였다. 다른 기회에 참여키 위하여 그는 영남·호남·호서의 유림중진을 설득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인 장서(長書)를 작성케 하였다. 이 장서는 그 이외에도 이중업(李中業)·곽대연(郭大淵)·유준근(柳濬根)·김 황(金榥) 등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連署) 날인하였다. 인쇄되어 국내의 각도 향교 등에도 배포되었으며 원본은 심산이 동년 3월말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우송케 하였다. 이 결과 제1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침체되었던 유림계는 한말구국을 위한 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심산은 상해에서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김 구(金九)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조직하였다. 이에 1919년 4월 25일 임시의정원 제3차회의의 결의에서 도지역별 의원을 선출하는 위원회를 개최, 4월 30일부터 열린 제4차회의에서 심산은 김정묵 등과 함께 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5차회의에서 그는 교통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부의장직에도 당선되어 구국활동을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한편 심산은 그의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화국민당(中華國民黨)의 손 문(孫文)을 비롯하여 오 산(吳山)·서 겸(徐謙)·장병린(章炳麟) 등과 교통하여 한·중공동 항일 운동을 추진토록 하였다.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의 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광동의 중국공교회원(中國孔敎會員)인 임복성(林福成)과 교유하면서 그곳 중의원(衆議院)에 나가 연설한 바도 있었다. 따라서 그곳 광동에는 한국독립운동 후원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상해에서 임복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였으며, 천진(天津)에서는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독립운동기관지 천고(天鼓)를 간행하였다.
1923년 1월 민족의 단합을 위하고 임시정부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자대회(國民代表者大會)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양분되었고 이때 심산은 창조파의 국민의회대의원으로 추대되었으나 참가하지 않았다. 구국항쟁의 일념에 있던 그는 이때 민족운동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가치 않았던 것이다. 1925년 이승만(李承晩) 임시대통령의 위임통치(委任統治) 주장이 문제되자 그는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이를 성토·탄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파면시켰다.
한편 국내외적 변화에 따른 임시정부의 광복운동이 침체하자 심산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서 동삼성(東三省) 일대에 한인교포들을 모아 집단거주지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산업의 추진,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여 국내로 진입하는 독립전쟁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중국국민당과의 교섭으로 만몽(滿蒙) 접경지에 황무지 3만 정보(町步)를 무상 조차하였고 이의 개간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그는 김화식(金華植)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경기·충청·경상지역에서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했으나 계획대로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는 국내에서의 잔학한 일제 식민지통치 아래 점차 상실되는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결사대(決死隊)를 파견, 각종 식민지기관을 파괴하기로 하였다. 1926년 이동녕·김 구·김원봉(金元鳳) 등과 상의, 1차로 의열단(義烈團)의 나석주(羅錫疇)를 파견하여 1926년 12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케 하였다. 국내의 유림들도 그를 도와 모금운동을 하였고 이에 600여 명의 유림이 투옥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였다.
1927년 5월 심산은 병으로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公濟醫院)에 입원 중 일본 밀정에 발각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4년형을 언도받은 그는 변호도 공소도 거절한 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이때 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그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림재단을 정리한 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육영사업을 목적으로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강인한 정신은 반민족 반민주적인 독소를 제거키 위해 전환되었다. 즉 1951년 독재정권인 이승만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下野警告文)을 내어 부산형무소에 또다시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52년 2·4정치파동 때 국제구락부사건(國際俱樂部事件)을 주동하여 재차 투옥되는 등 그의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는 지속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저서에 자서종요(字書綜要)와 벽옹70년회상기( 翁七十年回想記) 등이 있다.

註 예심종결결정서(1928. 8. 6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28. 11. 28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19. 5. 20 대구지방법원)
조선민족운동연감 6 16 19 23면
고등경찰요사 1 23 36 87 90 92 99 101 107 108 116 123 126 127 175 176 243 247 248 252 268 269 283 284 285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8·222 223 339 44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4면
무장독립운동비사 25 26면
기려수필 231 235 256 257 258 259 260 261 262 263 264 387 388 390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34·38·139·460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72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152 345 487 488 504 890 925 936 938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8·42·43·54·152·277·481 516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5·51·59면
동아일보(1928. 11. 29)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3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3·196·20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31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905 919 920 922 923 924 925 926 927 929 93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406 40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14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61 306 312 35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52면

  김창숙 [1879~1962] 대한민국장 서훈년도: 1962년
 
● 1919.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 제출
● 1919-1925. 임시의정원 교통위원 및 부의장
역임
● 1925. 독립군 기지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
● 1928. 징역 14년 수형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않는다.


5월의 독립운동가

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1879. 7. 10∼1962. 5. 10

1919.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 제출

이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교통위원 및 부의장 역임

1925. 독립군 기지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
1928. 징역 14년 수형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 대구형무소 옥중투쟁에서 (1928년) -

 


선생은 1879년 7월 10일 경북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峰洞)에서 호림(護林)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조선 중기의 명현인 동강(東岡) 김우옹의 후손이다. 자(字)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직강(直岡), 혹은 일제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여 지체 부자유의 앉은뱅이가 되었으므로 자칭 벽옹이란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정은석(鄭恩錫)에게 한학을 배웠고, 18세 이후에는 당대의 이름난 학자인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 등을 찾아다니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하지만 당시 나라 안팎의 정세는 선생을 학문의 길에 놓아두지 않았다.

당시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획득을 위해 동아시아 제국(諸國)들을 침략하면서 인류의 양심인 정의(正義)와 인도주의(人道主義)는 무너지고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논리만이 판치고 있던 시기였다. 이같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틈바구니에서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이제 막 자본주의체제를 갖춘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흉내내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기에 혈안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한편으로는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극복하여 민족 자주성을 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봉건적 악습을 타파하고 개혁하여 사회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중(二重)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민족 문제 해결에 솔선수범하는 선비가 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 학자들이 한갓 성리(性理)의 오묘한 뜻만 고담준론(高談峻論)할 뿐 시급한 구국책을 강구하지 않음을 선생은 병폐로 생각하여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성인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가짜 선비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따위 가짜 선비들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를 논하는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민족 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선비가 아니라 그 문제 해결에 솔선수범하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상소

선생의 이러한 신념은 「을사륵약(乙巳勒約)」의 체결을 계기로 격렬하게 표출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광무황제의 통치권이 현저히 손상되는 망국적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때 선생은 스승인 이승희를 따라 상경하여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려, 조약 체결에 적극 동조한 이완용(李完用)·이지용(李址鎔)·박제순(朴齊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 등 역신(逆臣)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선생은 통곡하며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뛰어 들었다.

2천만 국민이 담배 끊어 국채 보상하자

특히 1906년 말부터 “우리 대한제국은 1,300만원의 국채를 지고 있는데 이를 보상할 국고가 없으므로 2천만 국민이 3개월 간 흡연(吸煙)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자”고 하는 취지로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선생은 全國斷煙同盟會) 성주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것마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선생은 성주 지방에서 모은 단연금을 기금으로 자신의 선조인 동강(東岡) 선생을 모신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사립 성명(星明)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07년 6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이어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이 체결되면서 망국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민족 자위력이 박탈되고, 정부 각부의 한국인 대신(大臣) 아래 일본인 차관이 앉아 제멋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등 우리 나라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형편이었다. 이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해산군인들과 일반 민중들이 대거 의병투쟁에 참여하였고 장기적인 국권회복운동 전략으로 진행되고 있던 구국계몽운동 역시 한층 고조되어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일으키기에 우리 민족은 온갖 정열을 바쳐 갔다.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단체 가운데는 1907년 11월 결성된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있었다. 이 단체는 “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의 여하(如何)에 있다”고 하면서 국력 배양운동을 전개하다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계열의 인사들이 조직한 것이었다. 김가진(金嘉鎭)이 회장, 오세창(吳世昌)이 부회장을 맡고 있던 이 단체는 그 전신인 대한자강회의 사업을 계승하여 「대한협회회보」와 「대한협회월보」를 발행하고,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당시 “나라가 곧 망하겠다. 지금 문을 닫고 글만 읽을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1908년 대한협회의 지부를 성주 향사당(鄕射堂)에 설치하고, 그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때 선생은, “우리들이 이 모임을 만든 것은 장차 조국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조국을 구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구습의 혁파부터 시작해야 하며, 구습을 혁파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계급타파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계급을 타파하고자 할진대 마땅이 우리의 이 모임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봉건적 신분 질서의 청산과 그를 통한 전민족적 구국운동을 주장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혁신적 유학자로서 선생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이는 성리학적 신분 질서에 집착하고 있던 당시 유림들의 인식 전환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은 자 또한 역적

특히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사주를 받아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선생은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고 울분을 토로하면서 즉각 이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성주의 유림들을 모아 연명으로 일진회와 매국노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또 각 신문 지상에 발표함으로써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일로 선생은 성주 주재 일본군 헌병분견소와 경찰주재소에 피체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고, 성토문의 취소를 강요 받았지만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선생은 통분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미친듯이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학문을 닦으면서 서서히 우리 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되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곧 너의 나아갈 길이다”라고 하신 모친의 말씀을 듣고, 느낀 바 있어 이후 오직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에 의해 민족자결주의가 천명되고, 그해 11월 11일 공식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다음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졌다. 우리 민족은 이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획득하고자 국내외에서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와중에 강제 퇴위되어 덕수궁에서 칩거 중이던 광무황제가 1919년 1월 21일 갑자기 붕어(崩御)하고, 나아가 일제에 의한 독살설까지 전파되자 우리 민족의 반일감정은 더욱 촉발되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곧 이어 일어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던 3·1독립선언 계획을 가속화시켜 갔다. 선생은 모친의 병환으로 상경을 미루다가 이같은 독립선언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결국 3·1독립선언은 유교계 인사들이 빠진 채 천도교·기독교·불교계의 민족대표들만으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 제출

우리 나라는 유교의 나라인데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선생은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국 대표들에게 호소해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한다면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선생은 스승이자 영남 유림의 영수(領袖)인 곽종석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는 한편 파리장서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유림대표들의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서유림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거의 같은 동기와 목적에서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알게 되어 양측은 공동으로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곽종석·김복한 및 선생 등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아울러 이를 선생으로 하여금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선생은 3월 23일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용산역을 출발하여 중국 안동과 봉천을 거쳐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파리장서를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송부하는 한편 각국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에게도 보냈다. 또한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외 각지에도 보냄으로써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 만방에 전파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

이 시기 상해 독립운동계에는 3·1운동에서 표출되고 있는 민족 독립의 열기를 수렴하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지도 통괄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전개되고 있었다. 선생 또한 이시영(李始榮)·신채호(申采浩)·이동녕(李東寧)·신규식(申圭植) 등과 임시정부 설립 문제를 논의한 뒤,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구성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경상북도 의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공헌하였고, 나아가 교통위원회 위원으로서 활동하면서 안창호(安昌浩)를 도와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는데 협조하였다. 이후 선생은 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 국민당의 손문(孫文)을 비롯하여 오산(吳山)·서겸(徐謙)·장병린(張炳麟) 등과 교류하면서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설득하고, 이들과 함께 광주(廣州)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국독립후원회(韓國獨立後援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0년 8월 말 광주에서 다시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중국 공교회(孔敎會) 회원인 임복성(林福成)의 자금 지원으로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고, 한중 양민의 혁명사상을 고취하여 갔다. 그리고 선생은 1921년 1월 북경으로 옮겨 와 신채호가 박숭병(朴崇秉)과 함께 발행하고 있던 「천고(天鼓)」라는 잡지의 편집을 도와주면서 국내에 사람을 보내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특히 같은 해 4월 선생은 신채호·김원봉(金元鳳)·이극로(李克魯)·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1919년 2월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윌슨에게 우리 나라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을 규탄하는 「이승만 성토문」을 발표하여 절대 독립론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통할기관으로 만들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개편 문제를 둘러싸과 기존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여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하자는 개조론과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최고 통솔기관을 조직하자는 창조론으로 의견이 갈리어 서로 반목 갈등하는 모습을 노정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여러 차례 국민대표회의의 출석을 요청받았고, 또한 창조파에 의해 국민의회 대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하였지만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을 우려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선생이 예견한 대로 국민대표회의는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독립운동세력의 혼란과 분열만 가중시킨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독립운동에 활력을 주기 위한 전기 마련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선생은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동삼성 일대에 재만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방략을 추진하였다. 우선 선생은 중국 참의원 의원 이몽경(李夢庚)의 주선으로 풍옥상(馮玉祥) 장군이 관할하고 있던 만몽(滿蒙) 접경지의 황무지 3만 정보에 대하여 사용허가를 얻었다. 그런 다음 선생은 개간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1925년 8월 김화식(金華植)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경기·충청·경상 지역의 유림과 부호들을 대상으로 약 8개월 동안 비밀리에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선생은 1926년 3월 16일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되돌아 왔다.

국내외 독립운동이 매우 침체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선생은 김구(金九)·이동녕·유자명(柳子明)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국내의 정세를 설명하면서, “인심이 이미 죽었으니 만약 비상수단을 써서 진작시키지 않으면 우리 해외에 있는 사람들 또한 장차 돌아갈 곳이 없어 궁박하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오. 청년 결사대들에게 자금을 주어 무기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가 왜정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를 박멸하여 한번 국민의 의기를 고취시켜 봅시다”라고 제안하였다. 이에 김구와 유자명은 적극 동조하면서 행동대원으로 의열단원인 나석주(羅錫疇)를 추천하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가져온 자금을 유자명에게 주어 폭탄과 권총 등 무기를 구입하게 한 뒤, 천진에서 나석주를 만나 이를 전해주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나석주는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위해위(威海衛)에서 배편으로 1926년 12월 26일 인천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서울에 잠입하여 식민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투탄하고, 권총을 발사하여 일본인 3명을 사살하고 4명을 부상시키는 쾌거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탄환으로 장렬하게 자결, 산화함으로써 민족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선양하였다.

나석주를 국내로 잠입시킨 뒤 선생은 상해에서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였고, 1926년 12월 27일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건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여 갔다. 그러던 중 신병으로 상해 공동조계의 영국인 병원 공제의원(共濟醫院)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1927년 5월 1일 이같은 사실을 탐지한 일경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일본 나카사키(長崎)를 거쳐 국내로 압송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 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고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독립의지로 버텼다.

“나라가 없는데 본적(本籍)이 어디 있냐”

특히 선생은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변호사의 변론을 거부하였다. 나아가 선생은 일본인 재판장이 본적이 어디냐고 물으면 “없다”고 대답하고, 왜 없냐고 물으면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 등 재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12월 징역 14년을 받고 공소도 거부한 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일경의 고문과 장기간의 수형생활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병이 위중하여 1934년 9월 형징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창씨 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7일 피체되어 왜관(倭館)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선생은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비상국민회의 최고 민중지도자,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반탁 민주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1946년에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조직하면서 그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선생은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을 재건하여 학장·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 통일은 어느 때에 -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 1957년 겨울 心山 -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심산(心山) 수련관의 설립

 

 

 

1) 설립목적 :

2) 명칭 : (義城金家) 심산(心山) 수련관

3) 위치
가)대구(총 본관)
나)성균관대(분 관)
다)심산 기념관(분 관)

4) 규모 : 대형(체육센타)
가)대지 = x(㎡)
나)수용인원 = x(명)
다)주차시설 = x(대)  *자전거 전용주차장(대형)*

5) 시설 : 현대식 최신시설(장애인 복지시설 운영)
가)심산(心山) 체육관
나)호흡훈련 스트레칭 에어로빅 요가장
다)헬스장
라)수영장
마)농구장
바)클라이밍센타
사)건강식품점
아)음식점
자)은행
차)전산실
카)기타....

6)회원의 수송
가)버스
나)무료 자전거 대여
다)장애인 수송버스

 

 

 

                                                 心山 雲 武藝 협회의 구성

 

 

 


(義城金家)심산(心山) 운(雲) 무예(武藝) 협회의 구성

1)협회 구성의 원칙
가)
나)
다)

2)협회 구성원의 자격 : 義城金家 心山 雲 武藝를 수련후 지도자의 경력이 3년이상인 6단의 자격을 취득한자로....

가)총제 =
나)회장 =
다)부회장 =                                 
라)총무 =
마)임원 =                                                           
  ............                          
                           
 
                              < 협회 조직도 >


                                   총제

                                    ↓
 
                                                                                                              
                                    회                
                                         --------  회장특보
                                    장 

                                    ↓      
                    
                                  
                                    부
                                    회
                                    장


                                    ↓

                                    총 
                                    무 --------------------------------------국제특보
                                    부                                        
          
          ↓------------------------↓------------------------↓----------------↓
    
          ↓                        ↓                        ↓
        기술부                    운영부                    심사부            국제부
                                    ↓
          ↓                                                  ↓
     임 임 임 임 임         기  사  홍  감  자          임 임 임 임 임
     원 원 원 원 원         획  무  보  사  제          원 원 원 원 원
                            부  부  부  부  부                                  ↓

                                    ↓
                                 
                                 국내지부   --------------------------------- 해외지부

                                    ↓                                           ↓

                    서  경  강  충  충  경  경  전  전  제                      
                    울  기  원  북  남  북  남  북  남  주                     
                    지  지  지  지  지  지  지  지  지  지                      
                    회  회  회  회  회  회  회  회  회  회                    
                                                                                   
                    ↓  ↓  ↓  ↓  ↓  ↓  ↓  ↓  ↓  ↓                                                                                      
                    지  지  지  지  지  지  지  지  지  지
                    부  부  부  부  부  부  부  부  부  부
                    장  장  장  장  장  장  장  장  장  장

 

 

 

 


                                                    心 山 체육관
 

 

 

 

1)규모 : x

2)시설

가) 미트 = 쉴드(사각)미트/코칭미트/발차기(단,쌍)미트
나) 보호장구 = 헤드기어/호구/글러브/정강이/낭심보호대/백장갑/붕대/마우스피스 
다) 무기 = 쌍절곤/목도/죽도/곤/봉/목단검/전기충격기(모형)/총(가스총,권총..)
라) 타격연습용품 = 샌드백/인형 샌드백/메디신볼
마) 매트용품 = 태권도/유도매트/조립식매트/요가,에어로빅매트/매트운반차/정리대
바) 무기 = 쌍절곤/목도/죽도/곤/봉/목단검/전기충격기/총(가스총(모형),권총..)
사) 줄넘기....
       
3)무예 : 心山 雲 武藝

4)수련복
      a)수련복 : 색상 = 중간회색
      b)수련복띠 : 색상 = 진회색띠 정 중앙에 태극기 그림으로 급과 단을 결정한다
        아무것도 없이 흰 사각형 무늬는 무급
        흰사각형 무늬에 파란 반쪽짜리 태극무늬는 초급
        흰사각형 무늬에 완성 태극무늬는 중급
        건곰감리 태극기의 완성은 초단
       c)마크 : 색상 = 진회색 부채모양 안에 연회색 한자어표기(心山) 심장쪽에 마크 부착
       d)모자 : 색상 = 연회색(아주연한색)
       e)신발 : 색상 = 진회색(검정회색)

 

5)지도자의 자격과 특성

지도자의 자격
             a) 사범 :  心山 雲 무예(武藝)를 수련한 3단 이상인 자로 1가지 응용 병기술을 구사하는자
             b) 관장 :  心山 雲 무예(武藝)를 수련한 5단 이상인 자로
                                      3년의 지도경력, 정보처리 기능사 자격증, 회화(외국어)가 가능한자
                                     ---------------  ----------------------  -----------
특성 : 상 중 하의 3체급 사범 = 6명(남자3 여자3)과 관장 = 1명(총:7명)이 체급별로 지도한다


(6)체급

3체급으로 나누어 체급에 적합한 3가지중 1가지형을 익힐수 있게한다

 

                ** 호칭은 아호를 사용합니다**

 

                        < 도표 >

             
남자형 = 心  山형(상급 중급 하급)                                                           
여자형 = 장세증형(상급 중급 하급)  

 

        남  자(心  山형)              여  자(장세증형)
                    
상      心  山(헤비급)체급            장세증(헤비급)체급
                   
중      환  기(미들급)체급            환  기(미들급)체급  
                                          
하      찬  기(반탐급)체급            찬  기(반탐급)체급
        x   x (플라이)체급            x   x (플라이)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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